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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0. 2019

에클레시아의 원 뜻은?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로서 ‘ek(밖으로)’와 ‘caleo(부르다)’합성어이다. 이 말은 원래 아테네 시민의 총회인 민회를 가리키는 말로서 어떤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부름 받은 시민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594년 솔론은 귀족의 권한을 축소하고 시민의 권한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아테네 민회(ecclesia)를 소집하여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아테네 민회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꽃이었다. 


초대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하는 용어로 에클레시아를 선택하였다. 당시 교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단어가 여러개 있었다. 먼저 가정 교회를 뜻하는 오이코스(oikos)다. 오이코스는 성도로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로서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공동체를 뜻한다.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에 있는 오이코스는 대략 4,5개가 될 거로 추정한다. 


초대 교회는 건물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건물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았다. 건물이 없고 가정 단위 소그룹으로 모이다 보니 조직도 체계적으로 갖추지 않았다. 초대 교회 모임은 그리스 민회처럼 필요한 때 모였으며, 민주적이었다. 특별히 그리스 민회는 그리스 남자 시민만 참여할 수 있었고, 여자나 나그네나 외국인이나 종은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공동체는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이방인, 종이나 자유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가 모두 똑같은 자격을 가지는 하나의 신앙 공동체였다.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면에서 폐쇄적이었지만, 가입 조건에 인종, 언어, 민족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포용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 교회가 건물에 관심이 없었고, 건물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은 증거로 그들은 회당(synagogue)이란 단어로 교회를 정의하지 않았다. 사실 바울은 새로운 도시를 들릴 때마다 언제나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곳은 유대교인들이 모여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장소요, 또 교육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교회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회당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회당은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장소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회당은 예루살렘의 완고하고 보수적인 유대교와 달리 개방적이고 유화적이었다. 회당은 경건한 이방인을 환영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B.C. 200년 전에 이미 헬라어 구약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것은 디아스포라 회당이 헬라적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회당이란 말을 사용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성경학자들은 회당이 실제 건물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울은 결코 교회를 회당 혹은 건물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다고 하였다. 1) 에클레시아는 분명하게 지역적 회중(롬 16:1, 고전 11:18,22, 14:4,5,12,23,28) 혹은 회중들의 한 집합체(롬 16:4,16, 갈 1:2,22, 고전 4:17, 7:17, 11:16, 16:1)를 말한다. 


구약에도 신약과 비슷하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의 집회가 있었다. 구약은 ‘하나님의 회중’(qehal elohim) 혹은 ‘야훼의 회중’(qehal Jhwh)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쿰란 공동체에서도 사용하였다. 2)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70인 역은 구약의 ‘회중’(qehal)을 에클레시아(35번)나 혹은 회당(70번)으로 번역하였다. 70인 역 성서는 에클레시아와 시나고그의 구별을 강조하지 않고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단순히 70인 역의 에클레시아를 차용해서 썼다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교회의 정의를 어떤 단어로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초대교회의 몫이었다. 로버트 뱅크스에 따르면 바울은 자기 주변 사회와의 교류 그리고 여러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면서 바울 서신을 썼음을 지적하였다. 바울 신학은 결코 정적이거나 신학적 체계 안에 굳어진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동시에 성경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단어로 에클레시아를 선택하였다. 3)


사도 바울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는 헬라의 민회에서 차용하였지만, 헬라 민회의 성격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였다. 무엇보다 유대인이 회당 건물을 중심으로 모인 것과 달리 집회로서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하여 에클레시아를 선택하였다. 4) 그들은 가정 교회에서 모여 예배들 드리다가 정한 때에 주변의 가정 교회들이 하나의 집회로 모였다. 그들은 에클레시아를 통하여 예배, 기도, 성찬, 토론, 결정 등을 하였다. 


바울과 초대교회가 에클레시아를 선택한 이유는 건물이나 조직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요, 신분과 인종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어 평등한 민주적 집회를 생각하였다. 결코, 계급제도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건물 중심의 교회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초대 교회에서 에클레시아를 선택한 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채 건물과 조직과 계급 제도만 강조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본뜻을 잃어버린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1) J. 크리스챤 베커, ‘사도 바울’, 장상 옮김(한국신학연구소 : 천안) 1991년, 409쪽

2) 에케하르트 슈테게만, 볼프강 슈테게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손성현, 김판임 옮김(동연 : 서울) 2012년, 417쪽

3) 로버트 뱅크스, ‘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상’, 장동수 옮김 (여수룬 : 서울) 1991년, 27쪽

4) 홍성철, ‘사도바울의 에클레시아와 가정 교회’목회와 신학 2007년 11월호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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