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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17. 2019

브리스길라 이야기 2

고린도의 삶은 분주하였다.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인은 무더운 날씨에 아마포천으로 차양을 만들어 그늘지게 하였다. 천막과 차양은 지중해의 뜨거운 날씨에 살아가는 삶의 지혜이다. 아마포천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막지 않고 햇빛만 가려주기에 발코니나 윗 층의 베란다에 설치하였다. 굵은 아마포천은 더욱 튼튼하여 거리의 노점 천막을 만드는 데 유용하다.


고린도는 특별히 2년마다 한 번씩 5월 또는 6월에 포세이돈 신전에서 이스미안 게임이 열린다. 이 때는 세계 곳곳에서 축제를 즐기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돈 있는 사람은 숙박업소를 찾지만, 가난한 사람은 거리에서 햇빛만 가리는 천막을 치고 노숙하였다. 포세이돈 경기장도 거대한 차양을 쳐서 그늘을 만들었다. 간혹 바람에 찢긴 그물을 수선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었다. 1)


무엇보다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가 우리 집에 함께 살면서 보여준 삶의 태도는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함께 일할 때는 허물없는 직장 동료였지만, 말씀을 증거 할 때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사자였다.


나는 성경에 대하여 궁금한 점이 많아, 사도 바울에게 묻고 또 물었다. 바울은 나의 호기심과 질문에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고 성경을 자세히 풀어 가르쳐주었다. 그동안 가졌던 영적 갈급함과 목마름이 한꺼번에 다 해결되었다. 마치 예수님의 무릎 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처럼 나는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행복하였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삶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었다. 바울도 거룩한 척 위선 떨지 않고 우리에게 선교 전략에 대하여 고민을 털어놓았다.


"브리스길라 집사님. 저는 원래 아시아로 가서 선교하려고 했는데, 성령님께서 나를 이곳 그리스로 인도하셨어요. 그런데 그리스 선교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 말씀을 전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은 나를 박해하고 쫓아내었지요. 나는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며 견디긴 하지만, 때때로 실망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고린도에 와서 집사님 내외분을 만나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바울 선생님 저희가 무슨 한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아니에요. 집사님 내외분이 저를 따뜻하게 맞이하시고,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고, 무엇보다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 고린도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은 정말 큰 은혜입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유럽으로 저를 보내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집사님 내외분을 만나게 하신 것 같아요. 앞으로 우리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요."

"감사합니다. 저희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고 불러 주시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집사님 회당 전도 방법을 바꾸어 볼려고 하는데 집사님 의견을 듣고 싶어요. 저는 지금까지 회당에서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크게 반발했지요. 집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바울 선생님. 저희도 로마에서 그 일 때문에 크게 봉변을 당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이 생겼다고 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처음부터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것이 아니라 먼저 구약을 통하여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고 그 후에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집사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고린도에서는 전략을 바꾸어 해보도록 하지요."


과연 새로운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회당장 그리스보는 바울의 가르침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처럼 밤에 우리를 찾아와 구약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무엇보다 고린도의 유력자이며 로마인인 디도 유스도가 예수를 믿기로 하였다. 2) 그날 바울이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얼마 후 바울을 따르는 제자 디모데, 실라, 누가도 찾아왔다. 3) 우리 집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하였다. 매일 저녁마다 우리 집에서 기도 모임을 가졌다. 기도회의 정식 멤버는 바울, 디모데, 실라, 누가, 그리스보, 디도 유스도, 남편인 아굴라, 나 브리스길라 8명이었다. 가끔 그리스보와 디도 유스도의 아내도 참여하였으며, 겐그리아에 사는 뵈뵈 집사도 참여하였다. 매일 저녁 모임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쁘긴 하였지만, 여인들끼리 부엌에서 나누는 대화도 풍성하고 즐거웠다.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전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우리는 날짜를 정하고 작정 기도회를 가졌다. "하나님! 우리의 미련하고 둔한 방법과 계획에 함께하여 주셔서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마침내 정한 날이 되었다. 나는 흥분한 마음으로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니 더없이 푸르렀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까? 우리 선교팀은 다시 한번 기도하고 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울은 강한 확신과 능력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분명히 밝히고 힘 있게 설교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놀라웠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증거 될 때는 반드시 찬성과 반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바울의 설교에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보수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바울을 비방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적대적 반응에 바울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옷을 털며 말하였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7)


반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디도 유스도는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나는 예배처소를 유스도의 집으로 옮기는 것에 찬성하였다. 그동안 우리 집이 선교 센터 역할을 하였지만, 이제 우리가 기독교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모여야 하기 때문에 디도 유스도 같은 유력한 로마인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아무리 과격한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디도 유스도에게는 대적하지 못할 것을 나는 알았다.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믿는 무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회당장의 변화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도 찾아와 예수를 믿고 영접하였다. 전통과 관습에 사로잡힌 회당은 점점 쪼그라들었지만, 고린도 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그리스보가 회당을 떠난 이후 저들은 소스데네를 새로운 회당장으로 세웠다. 그러나 한번 기울어진 추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부흥하는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험하였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핍박하고 바울을 쫓아낼 것인가 고민하는 듯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저들의 마음을 녹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철학자 세네카의 동생 갈리오(L. Junius Gallio Annaeus)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하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고발하였다.4) 고발 내용은 어이가 없었다.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들은 아무런 증거자료도 없이 오직 거짓과 모함과 욕설로만 고발하였다. 지혜로운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의 고발을 일고의 여지도 없이 기각하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분열하여 갈등하고 싸웠다. 고발 사건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다 때렸다. 과격하고 보수적인 유대인의 분풀이였다. 억울하게 매를 맞은 회당장 소스데네도 이 사건을 계기로 보수 유대인들에게 치를 떨며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과거 그의 잘못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다. 소스데네는 감동하였고, 마침내 그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하였다. 5) 이제 고린도에서 과격파 유대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고린도 선교 사역이 열매를 맺으면서 안정을 찾자, 바울은 새로운 선교지를 향하여 떠나기로 하였다. 아굴라와 나는 고민하였다. 천막 사업이 잘되고, 교회가 안정되지만, 바울과 헤어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세상의 평안을 추구한다면 고린도에 머물러야 하겠지만, 남편과 나는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기로 하였다. 로마에서 추방당할 때 우리는 이미 헌신을 다짐하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본 경험이 있기에 고린도에서 성취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데도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기꺼이 바울의 선교 여행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6) 태풍이 불지 않는 여름을 선택하여 우리는 배 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는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였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1) 흔히들 바울이 염소가죽으로 천막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틀린 이야기 같다. 유대인들은 죽은 짐승의 가죽으로 무두질하는 작업을 매우 천시하였다. 로마 시대 짐승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군인들의 막사이다. 전쟁터와 같은 험악한 장소에서 사용하려면 비싸더라도 가죽으로 만든 천막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이나 원형 경기장의 천막은 대개 아마포를 사용하였다. 바울과 아굴라가 가진 천막 기술은 가죽으로 천막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아마포천을 사용하는 기술로 짐작할 수 있다. (Jerome Murphy-O'Connor, ‘초대교회에 있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위치’ 그말씀 1993년, 두란노, 205쪽 이하 참고하라. 제롬 머피-오코너는 “St. Paul's Corinth: Texts and Archaeology”의 저자이다. )

2) 행 18: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디도 유스도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허락한 것은 그가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3) 행 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4)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복무한 것은 2년인데 정확히 AD51-52년이다. 갈리오의 총독으로 부임한 AD51년은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의 정확한 년도를 파악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존 스토트, '땅끝까지 이르러' 정옥배 옮김 (IVP : 서울) 1992년,  356쪽 참고)   

5)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6) 존 스토트는 바울의 나머지 선교여행 경비를 브리스길라 가정이 조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존 스토트, '땅끝까지 이르러', 35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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