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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3. 2019

바울은 여성 차별주의자였을까?

대부분 사회는 특별한 논리적 근거 없이 사람을 차별한다. 인도는 카스트에 따라, 이슬람 제국은 종교에 따라, 미국은 인종에 따라 공식, 비공식으로 차별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화교,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탈북민 등에 대하여 공공연히 차별한다. 나라마다 문화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차별의 양태는 다양하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모든 인간 사회에 만연한 차별은 성차별이라고 하였다.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하다. 특별히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그러한 성향이 뚜렷했다. 미혼 여성은 아버지의 소유물이었고, 기혼여성은 남편의 소유물이었다. 혼자 사는 여자는 남자들이 언제든지 함부로 대하고 성폭행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대인 역사가 필로(Philo of Alexandria, BC20~AD 50)나 그리스의 작가 메난더(Menander, BC 342~290)와 유리피데스(Euripides, BC480~406)는 같은 말을 하였다. '훌륭한 여성의 경계선은 대문이며, 처녀들은 집 안에서, 가능하면 외부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장신구였기 때문에 그것을 더럽힐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남자와 접촉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만일 부득이하게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보호자와 함께 베일을 쓰고 나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은 여성은 창녀나 노예들 뿐이었다. 


이러한 부당한 현실에 여성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며 성차별과 성 억압의 현실에 도전하였다. 로마의 원로원이자 역사가인 카토(Cato the Elder, BC 234~149)는 리비우스(Livius)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방금 전 나는 길게 늘어서 있는 여자들 사이를 지나 광장으로 오면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 야외를 활보하고 거리를 꽉 메우고 남자들한테 말을 걸다니, 이 무슨 관습이란 말인가? 우리 선조는 여자들이 보호자나 교사 없이는 어떤 활동도, 심지어 사적인 활동조차도 하지 않기를 원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은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말을 하면, 매우 불쾌하였으며, 공공장소에 여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은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시작한 나라지만, 역설적이게도 여성 차별을 가장 심하게 한 나라였다. 민주주의 꽃이라고 하는 민회(ecclesia)는 오직 남자만 참여하였다. 아테네에서 무엇을 계획하고 토론하고 결정한다 해도 여자는 참여하거나 발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연극의 여자 역할도 남자가 대신하였다.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는  '여자는 보아야 하는 것, 그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여자는 입 닥치고 듣기만 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그리스 로마 사회적 배경에서 기독교의 집회(ecclesia)를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에클레시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말하였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 말은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나 남녀의 차이를 철폐한다는 말이다. 여성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세례를 받고 에클레시아 회원으로 받아주었다. 


그리스의 에클레시아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있었다. 공공의 장소에서 대중을 상대로 연설하고, 투표하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기독교가 그리스의 민회(ecclesia)라는 말로 교회라고 한 것은 그들의 평등한 민주주의 문화가 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독교 에클레시아는 그리스와 달리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이나 계급 차별이 없었다. 


초대 기독교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 등이 어떠했는지 바울의 언급들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안드로니고의 부인 유니아는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김 받고 자신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함으로써 사실상 사도 급으로 인정하였다.(롬 16:7) 브리스길라는 초대 교회 최고 신학자인 아볼로를 가르쳤고,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버시는 바울 선교에 동행했던 여성 선교사였다.(롬 16:12) 집사(diakonos)로 언급된 최초의 여성은 뵈뵈이다. 그녀는 겐그리아 교회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디모데전서 5장 2절에 우리말 성경은 늙은 여자로 번역하였지만, 헬라어는 여자 장로를 의미하는 presbyterai이다. 


처음 기독교 공동체(ecclesia)에서 여성은 공적 모임(예배)에서 예언도 하고 대표 기도도 하였다. 바울도 그 점을 인정하면서 다만 머리에 베일을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고전 11:5,13) 어찌 보면 당연한 충고이다. 에클레시아에 참여한 회원은 누구라도 자유롭게 발언하고, 토론에 참여하고, 지도자가 되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에클레시아의 뜻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에 가면, 바울의 어투가 바뀐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 14:34-35)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공적 모임에서 기도와 예언을 금하지 않던 바울이 14장에서 태도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남성 성경학자는 그 이유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바울도 여성차별을 인정했으니 우리도 여성을 차별하자고 결론 내렸다. 여성 장로, 여성 목사, 여성이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정말 성차별을 하려고 이런 태도를 보였을까? 


초대 기독교는 선교하면서 두 가지 태도를 보였다. 첫째는 로마 세계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를 이단으로 취급하고 박해하였다. 기독교 에클레시아(집회)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성만찬은 인육을 먹는 모임이라 하였고, 에클레시아에서 여성이 지도자 역할을 하며 발언하는 것은 로마의 풍습을 어기는 악행이라고 하였다.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 미누키우스 펠릭스(Marcus Minucius Felix,?~250AD)는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욕하는지를 기록하였다. 

“그들(기독교인)은 민중의 최하층 출신으로 무식하고 쉽게 잘 믿는 여자들로서 이미 여성이라는 약점 때문에 쉽게 남의 말에 넘어간다. 이 비밀 결사대는… 밤에 모여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고 근엄한 금식을 실천하는데 거룩한 의식을 통한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통한 비인간적인 연회에서 그런 모임을 가진다. 그들은 곳곳에서 소위 일종의 감각적 제의를 실행한다. 그들은 서로 차별 없이 형제와 자매로 부른다. 그리하여 뻔한 음란 행위가 이러한 거룩한 이름을 통해 근친상간으로 발전한다. 어느 축제일에 그들은 모든 아이, 자매, 어머니, 연령이나 남녀 차별 없이 음식을 나누기 위해 모여든다.”


로마 제국에서 이제 막 선교하기 시작한 작은 모임인 기독교 에클레시아는 온갖 흉흉한 소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오해를 풀고 세상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 진리에 저촉하지 않는 한, 로마 문화를 수용하려고 애를 썼다. 1세기 교회를 연구한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 신학은 세상과 동떨어진 신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들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두 번째 태도는 문화 수용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처음 기독교 에클레시아에서 시행하던 여성의 설교나 가르침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은 그전에 여성이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바울은 정말 성차별을 한 것일까?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에서 동역자들을 언급하였는데 그중 여성은 15명이었고, 남성은 18명이었다. 사도행전에 언급한 가정교회 지도자 중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따라서 초대 기독교 에클레시아는 여성 차별이나 계급 차별이나 인종 차별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 역시도 성차별을 옹호하였다기보다, 큰 목적인 선교를 위하여 잠시 양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제는 한번 양보했던 차별이 점점 굳어지고 나중에는 그것이 기독교 정신인 양 오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시대 처음 기독교가 가졌던 혁명적 태도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발전해야 마땅하다.


1.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 서울) 2016년

2. 에케하르트 슈테게만, 볼프강 슈테게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손성현, 김판임 옮김 (동연 : 서울) 2012년

3.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장혜경 옮김 (어크로스 : 서울) 2018년

4.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 (좋은 씨앗 : 서울) 2016년

5.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김덕수 옮김 (현대지성사 : 서울) 1999년

6. 김경현,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전기 사이 로마 상류층에서 여성해방의 실제’(서양고전학연구 11집)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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