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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r 18. 2019

유대교는 선교적이었을까?

유대교는 선교적이었을까? 많은 사람이 유대교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할 때 정통 유대교인들이 바울을 심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할례와 율법을 강조하는 바리새주의와 논쟁 하면서 기독교가 모든 이방을 향하여 열린 종교임을 변증 하였다. 


그러나 유대교는 다른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보수파가 있는가 하면 진보파도 있다. 바리새파 중에도 매파인 샴마이(Shammai Ha-Zaken, BC50~AD30) 파와 비둘기파인 힐렐(Hillel, BC70~BC10?) 파가 있었다. 1) 샴마이 파는 이방인과 일절 접촉하지 않았으며, 모세 율법에 대하여 엄격한 해석을 하였고, 로마 정부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반면에 힐렐 파는 보다 온건하여 율법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였다. 초기에는 샴마이 학파가 지지를 받았으나 점차 유대교는 온건한 힐렐 파를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그 점은 유대교가 다양성과 포용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바울은 힐렐의 손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선교를 반대하며 샴마이를 따르는 강경 바리새인들과 심한 논쟁을 하였다. 이 점이 유대교 전체를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종교로 오해하게 하였다.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이 희생 제사를 드려 여호와께 예배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하면서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장 제도가 사라지면서 큰 위기를 경험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회당이다. 회당은 포로로 끌려간 유대 민족이 타향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모임 장소이다. 바벨론이 유대인을 한 지역에 모여 살게 하지 않고 전국으로 흩었기 때문에, 유대인은 10명의 남자만 모이면 회당을 구성하였다. 


독일의 신약학자인 슈테게만(Stegemann) 쌍둥이 형제의 역자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에서 회당을 설명한다. 

“그리스의 비문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기원전 3세기 후반 디아스포라에 회당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는 기원후 1세기 예루살렘의 테오도투스 비문과 가믈라, 헤로데이온, 마사다의 고고학적 출토물이 가장 오래된 증거들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땅에서 회당은 비교적 후대에, 아마도 마카비 이후 시대에 나타났다고 추정한다. … 그러나 기원후 70년 이전에는 디아스포라와는 달리 팔레스타인에 있는 회당의 수는 제한적이었다.”2)


회당은 주로 토라의 낭독과 율법 강의의 장소로 쓰였으며, 어린이 교육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회당은 기본적으로 성전과 제사장이 없다는 전제하에 유대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이다. 따라서 정통 유대교와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에스더 8장 17절에 보면 이방인 중에서 “유다인이 되는 자가 많더라”는 말이 나온다. 이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신약성경에는 디아스포라 회당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들은 유대교를 호의적으로 생각하여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율법을 부분적으로 지키며, 유대 공동체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할례는 받지 않은 자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추정될 만한 사람이 신약에 많이 등장한다. 빌립 집사의 전도를 받은 에티오피아의 내시도 예루살렘에 예배하다 돌아가는 중이었다. 베드로의 전도를 받은 고넬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며,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할 때도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있었으며(행 13:43,48), 이고니온 회당에도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 믿었다.(행 14: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회당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로 보건대 디아스포라 회당은 비록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지만, 유대교에 호의적이고 율법을 경청하는 자들을 회당에서 받아들였고, 회당 예배와 회당 회의에도 참여하였으며, 회당 건축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디아스포라 회당의 개방 정책은 구약의 선교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모든 민족의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들을 통하여서도 장차 이스라엘이 열방의 빛이 되어야 하며, 열방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유대인들이 선교적이라는 증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드러난다.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마 23:15). 유대인들은 선교를 완전히 무시하고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유대교 중에 일부는 상당히 열린 자세를 가졌으며, 선교에도 적극적이었고, 이방인을 유대교 안으로 받아들이는데도 개방적이었다. 특별히 회당을 중심으로 이방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졌다. 


슈테게만은 디아스포라 회당이 팔레스타인 본토에 확산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음을 설명한다. 아무래도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을 것이다. 3) 복음서에 회당이 등장하는 데 주로 갈릴리 지역이다(마 4:23). 특별히 가버나움과 나사렛의 회당을 언급한다. 이 두 고을은 공교롭게도 예수님과 베드로가 자란 동네이다(마 4:13).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과 달리 디아스포라 회당 문화를 일찍 받아들였다. 이점은 이들이 보수적인 예루살렘 유대교와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유대교를 선호하였음을 암시한다. 

가버나움 회당

가버나움을 고향으로 한 베드로 역시 이러한 사회 지리적 배경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후일 초대교회에서 이방 선교의 문을 여는데 적극 활동한 근거도 이러한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를 공인하였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므로 이방 선교의 문을 열었으며,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보수파 주장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확증하였다. 


베드로가 깊은 학문은 없었지만, 갈릴리 회당을 중심으로 한 온건한 유대교, 선교적인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바울만큼이나 선교에도 적극적이어서 베드로전서를 보면 터키 전 지역이 그의 선교지였고, 나아가 고린도 지방에도 게바파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영향이 그리스에도 퍼졌으며,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에도 매파와 비둘기파가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확고하게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1.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샴마이는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힐렐의 제자인 가말리엘도 활동하였다. 

2. Ekkehard W. Stegemann, Wolfgang Stegemann, Urchristliche Sozialgeschichte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손성현, 김판임 옮김 (동연 : 서울) 2012년 233-4쪽

3. 초대교회에서도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 파 유대인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행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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