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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r 31. 2019

요셉은 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갔을까?

아우구스투스는 정적인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고 명실상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다른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구조사를 했다. 인구조사의 목적은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목적을 가진다. 누가는 이 사실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눅2:1)


이 말씀이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첫째 인구 조사 연도가 예수 탄생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 문제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성경보다 세속 역사 자료를 더 신뢰하므로 누가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고대 로마 제국의 영토는 광대하고 인구 통계 조사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므로 지역마다 수시로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정확한 시기를 특정한다는 것은 무리이며, 역사적 증거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성경 기록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둘째 로마의 인구조사는 각자의 고향에서 호적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왜 요셉은 고향으로 갔을까?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라 베들레헴으로 간 것은 로마의 정책보다 전통적인 유다의 관습을 따라 했다.


셋째 요셉은 왜 산달이 다 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갔을까? 나는 이 부분이 궁금하였다. 지금도 국가에서 인구센서스를 조사할 때는 무려 일 년의 시간을 두고 조사한다. 그만큼 통계 조사가 어렵다. 고대 사회에서 고속도로나 자동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정한 시간에 인구조사를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최소한 일 년 이상의 시간 여유를 준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가 약 160km이다. 하루 20km씩 걷는다고 생각하면, 8일이 걸리는 거리이다. 해산할 부인과 함께 걸으면, 그 거리는 반 이상 줄어든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대략 16일에서 20일 걸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상상해 보아야 한다. 요셉은 여인의 출산 정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10개월이면 출산한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더욱이 로마의 호적 조사는 정해 놓은 시간도 없고, 무려 일 년 이상의 여유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출산한 후 몸조리를 하고 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 어떤 분은 마리아가 나귀를 타고 갔으므로 별로 어렵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과연 요셉이 나귀를 키울 만큼 재력이 있었을까에 의문이 간다. 그는 아기 예수의 정결 예식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의 제일 가난한 사람이 드리는 비둘기를 드렸다. 따라서 마리아가 나귀를 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나귀를 탔다고 할지라도 만삭의 부인이 나귀 타고 여행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뿐만 아니다. 로마인은 유대인을 군사로 징집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 호적 조사의 목적은 순전히 세금(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인은 애굽의 정책을 따라 여성에게는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굳이 마리아까지 호적 조사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요셉은 왜 무리를 해가면서 해산할 날이 다 된 마리아를 데리고 갔을까? 어떤 분은 마리아가 처녀로 임신하였기 때문에 고향에 두고 가면 동네 사람이 해코지할까 봐 두려워서 데려갔다고 추측한다. 처녀가 임신하였을 때 남자가 그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면, 유대의 관습에서는 그 여자를 절대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해코지당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해진다. 요셉은 왜 마리아를 데리고 갔을까?


여기서 우리는 성경 시대 사람과 오늘 우리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세기 지중해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는 개인(individual)에 대한 개념을 전혀 가지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였다. 개인주의는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시대에 확산되고 현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오늘날 개인에 대한 개념은 확실하다. 개인은 양심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이며, 자기 결정권, 행복 추구권을 생득적으로 가지는 존재이다. 이 권리는 천부적 권리이므로 헌법이 명시하고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


고대 사회에서 개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별 의미가 없다. 고대인은 고향의 지명이나 가족 이름을 그냥 이름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이 곧 자기라는 뜻이다.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영화 벤허(Ben-Hur)가 있다. 벤허는 ‘Hur 집안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자기 이름보다 집안 이름이 훨씬 중요하였다. 1세기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 집안의 명예와 수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가족, 마을, 공동체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두었다. 만일 개인의 사유로 공동체의 집단행동에서 빠지려고 한다면, 그는 그 공동체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요셉이 해산할 부인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 조사하러 갈 만큼 무식하고 무모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결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다. 그의 공동체 전원이 그때 가기로 하였기 때문에 요셉은 빠질 수가 없었다. 로마의 법이나 정책이 어떠하든지 유대의 관습을 따라 공동체가 움직이기로 하였으면, 개인적인 사유로 빠지겠다거나, 연기하겠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해산할 부인을 데리고 가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건 공동체 전원이 그것을 고려하여 함께 도와가며 가는 것이다. 요셉은 공동체와 함께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 조사하러 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세기 시대 상황에서 쓰인 성경의 공동체성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개인주의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았다.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구원은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받는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공동체성이다. 고넬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그와 그의 가족, 심지어 종들까지 모두 세례를 받았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하였다. 아버지가 믿으면 가족은 자동으로 아버지의 결정을 신뢰하고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그 당시 사고방식이었다. 성경에서 '너희'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살펴보라. 그것은 명백히 초대 교회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지, 개인주의 사고 방식을 가진 개인에게 주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으며, 제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특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을 포함하여 사도들은 개인이 신앙생활을 잘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구원받는 것도 말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속성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초대 교회가 힘을 발휘한 근본적인 동력은 그들이 이루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그것을 ‘집단 인격’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세다를 향하여 저주를 퍼부었다. 그것은 그곳의 집단 인격이 어떠함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개인주의 신앙에 함몰되었다. 기독교 공동체의 집단 인격은 상실하고, 나 개인만 예수 잘 믿고 구원받으면, 다 되는 줄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신앙은 홀로 있을 때 어떤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느냐에 있다기보다,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관계 속에 있다. 신앙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가 공동체 안에서 사람과의 바른 관계로 드러나야 한다. 한국 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개인 신앙과 개인 인격 보다 기독교 공동체의 인격과 신앙 회복이다.


참고도서

1. 랜돌프 리처즈 / 브랜든 오브라이언, '성경과 편견', 홍병룡 옮김 (성서유니온 : 서울) 2016년

2. 김득중, 성서 주석 누가복음 1, (대한기독교서회 : 서울) 2003년

3. 노발 겔든휘스, '누가복음 상', 이장림 옮김 (생명의 말씀사 : 서울) 1983년

4. 그랜트 오스본 편집, '누가복음', 김진선 옮김 (성서유니온선교회 : 서울) 2009년

5. 브루스 J. 말리나, '신약의 세계 - 문화 인류학적인 통찰', 심상법 옮김 (솔로몬 : 서울)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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