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헬라어로 Euangelion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복음(Euangelion)이란 말을 들었을 때 몹시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단어는 성경 용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말은 그리스 로마인들 주로 쓰던 말로서 왕이 태어나거나 혹은 왕이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축하하기 위하여 썼던 말이었다.
제임스 던(James D.G. Dunn, 1939~)에 의하면, 유앙겔리온이란 전문 용어를 맨 먼저 사용한 사람은 바울이었다고 한다. 바울은 복음을 어떤 용어로 소개할까 고민하였다. 그는 선교지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를 선택하였다.
“왕이 나셨다. 왕이 오셨다. 왕이 승리하셨다. ”를 뜻하는 유앙겔리온으로 복음을 소개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인이 로마의 핍박에서 순교한 가장 큰 이유는 로마 황제가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신앙고백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겪으면서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으로 기대하였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파하실 때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이 치유와 회복과 자유를 경험하는 나라다. 이 소식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정말 복음이었다. 흔히 신약 4 복음서를 예수님의 전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아니다. 전기란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을 포함하여 전 인생을 쓴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만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것을 복음서라 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오셨음을 뜻하여 복음서라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유앙겔리온!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셨다."라고 선언하였다. 그건 수백 년 동안 유대인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자연스러운 반응은 베뢰아 교인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일이었다.
사람은 함부로 남의 말을 믿지 않는다. 처음, 귀에 듣기 좋은 소리라고 그럴듯하여 믿을 수 있지만, 그다음엔 반드시 검증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실까? 정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건가? 베뢰아 교인들이 했던 검증 방법은 구약 성경의 말씀과 복음 전파자들의 말이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말은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맞출 수 있다. 기독교인들처럼 말 잘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말만 가지고 믿을 순 없다. 그다음엔 그 말을 전한 사람을 살피는 일이다. 그들은 정말 그 말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욕심인가?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이 땅에 이루어지는가? 사랑, 은혜, 용서, 화목, 환대, 포용은 실천하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쟁하고, 험담 하는가?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에선 지금도 그리스도인이 순교한다. 크리스천 어린아이들이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준다 해도 아이들은 예수를 고백하고 모두 순교하였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인을 ‘뺀떼’(Pentecostal 을 줄여서 부르는 비속어)라고 부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뻰떼들은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면서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들의 신앙은 공동체 지향적이며 문화와 삶에 깊이 뿌리내리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불신자들이 뻰떼라고 놀리면서도 회사에서는 신뢰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뻰떼에게 재정을 맡기고, 은연중에 자기 딸을 뻰떼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들 뻰떼의 신앙은 말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이고,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버린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던 공동체를 등지는 일이요, 자신이 지금까지 왕으로 모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이다.
초대교회가 복음 전파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선교에 대한 계획과 전략과 투자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살았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몸부림치면서 애를 썼다.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생명을 함께 하던 공동체였다.1)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위하여 눈이라도 빼주려고 하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다. 초대 교회 환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접대나 환영이 아니었다. 그건 생명으로 연결된 연합이고 연대였다.
1970, 80년대만 해도 4 영리를 가지고 나가 복음을 전파하면 열 명 중 아홉은 예수를 영접하였다.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땅콩밭에 천막만 쳐도 교회가 성장했다. 그때 우리는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검증받았다. 과연 한국 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가? 과연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과 똑같은가? 요즘 대학가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면 온종일 전도해도 한 명 믿을까 말까 한다고 한다. 무엇 때문일까? 한국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이 가짜임이 판명 났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에 두 번 속지 않는다. 이제는 교회 안의 사람들마저 교회를 떠나고 있다.
말만 번지르하여 하나님 영광, 하나님 은혜, 하나님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 은혜와 사랑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영광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모두 가로채고 있다. 영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교만하고, 신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비판과 판단을 일삼고, 은혜받았다는 사람이 더욱 야박한 모습을 보인다.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떤 조직보다 더 비열하고, 욕심 많고, 파당 짓고 싸운다. 한국 그리스도인이 모인 곳은 어디나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서로 헐뜯고 욕하고 갈라서고 죽일 듯 미워한다.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좋은 소식을 온통 가짜 뉴스로 바꾸고 있다. 예수님은 전도에 열심을 내던 바리새인을 비판하였다.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1) 초대 교회에는 개인 전도 개념이 없었다. 개인주의는 근대에 이르러서 등장한 개념이지 고대에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전도 방법은 먼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고 자신의 공동체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음을 증거하므로서 그 공동체에 초청하여 사랑하고 은혜를 나누고 생명을 나누는 관계를 가졌다. 현대 교회는 개인전도에 함몰되어 이기적인 신앙인들만 양산하고 있다.
2) 구약의 하나님은 가짜 뉴스를 전하는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을 미워하면서 성전 문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복음서의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거짓 복음을 전하는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였다. 혹여나 지금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서 교회 문 닫았으면 좋겠다거나 전도에 열중하는 그리스도인을 저주하지는 않을지 너무나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