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를 포함한 세계 주요 종교는 모두 평화와 사랑을 가르친다. 역설적이게도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면서 그들은 미움과 갈등과 싸움과 학살을 자행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1562~1598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8번의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동족 간의 전쟁이었다. 종교개혁 후 프랑스 남부 나바르를 중심으로 개혁 사상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1562년 강한 가톨릭 성향이 있는 기즈(Les Guise) 공작은 예배드리던 위그노 개신교를 기습 공격하면서 신구교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이단시하면서 폭력을 일삼았다. 양쪽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어렵게 휴전을 하고 신·구교는 화해하기로 하였다. 가톨릭 측 발루아 왕가의 딸 마르그리트와 개신교 측 부르봉 왕가의 신랑 앙리 4세의 결혼식으로 진정한 화합과 평화를 이루기로 하였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의 날 결혼식이 열렸고 개신교 지도자 3,000명은 초대되었다. 그러나 결혼식은 속임수였다. 기즈공작과 여왕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개신교 지도자 3,000명을 단 하루 만에 학살하였다. 그것을 신호로 프랑스 전역에서 10만 명의 개신교인을 죽였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날 사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선행을 강조하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은 사랑을 강조하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살해하였다. 이 하루 동안 기독교인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이 300년 동안 죽인 기독교인의 숫자보다 많았다.
바르톨로메오 학살을 시작으로 화해할 것 같았던 신·구교는 다시 전쟁의 화염에 휩싸였다. 이후 26년 동안 프랑스 개신교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추방당하였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 평화, 선행은 어디에 있는가? 말로는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사랑을 실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 글을 팔로우하는 사람 중에도 가나안 성도가 여럿 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교회에 사랑이 보이질 않아서 떠났다고 한다. 용서를 가르치지만, 교회에서 용서를 찾기는 정말 힘들다. 비판과 판단과 손가락질이 난무하는 곳이 교회다.
가슴 아픈 소리를 들었다. 길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을 보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싸우려면 교회 가서 싸우라.”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미국에 오면서 나는 미국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서로 싸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느 교회를 가야 할까 나는 고민하였다. 공교롭게 내가 머물던 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로고스 교회가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았다. 커다란 예배당에 교인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기에 새로 온 나는 금방 눈에 띄었다.
젊은 담임 목사는 예배 후 나에게 식사나 한 번 같이 하자고 하였다. 함께 식사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금방 마음이 통하였다. 나는 고민할 것 없이 로고스 교회에 등록하였다. 다만 은퇴한 목사가 교회에 나가면 젊은 담임 목사에게 부담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교회는 소문에 듣던 미주 한인 교회와 달랐다. 사실 로고스 교회는 한때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다, 담임 목사가 바뀌면서 분란이 일어나고 대다수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거의 문 닫을 지경에 부목사를 하던 젊은 목사가 담임하게 되었다.
몇십 명 남은 교인은 커다란 교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젊은 담임목사는 교인들을 사랑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묵상한 말씀을 카톡으로 보내주고 (단체 카톡 방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전 교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서 기도 제목을 받아 기도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성도들을 추스르기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 내가 로고스 교회를 찾았다. 교인들은 담임목사와 함께 마음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교인들은 불평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여야 교회가 살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
사실 목사가 교회 출석하면 할 일이 별로 없다.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성가대 봉사를 결심하였다. 30명이 안 되는 성가대는 따뜻하였다. 원로 장로, 시무 장로, 권사, 집사, 청년이 함께 어우러진 성가대는 가족이었다. 성가대 막내인 나는 목사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막내답게 굴기로 하였다. 처음 등장한 목사에 대해 경계할 만도 한데 성가대원들은 나의 경망스러운 말과 행동도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을 독사 굴로 묘사하였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The infant will play near the hole of the cobra, and the young child put his hand into the viper's nest. 사 11:8)” 아무것도 모르는 젖 먹는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곳이 천국이다. 새신자의 경망스러운 말과 행동, 아무것도 모른 체 멋대로 장난치는 행동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험담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가끔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곳은 독이 가득한 지옥이다. 교회 일은 할는지 모르지만, 조직과 시스템은 돌아갈는지 모르지만, 그곳은 명백히 날카로운 독 이빨이 가득한 지옥이다. 그들은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 나는 정말 간절히 당부하고 싶다. 제발 교회를 그만 사랑하라고.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허물이 있고, 부족함이 있고, 잘못이 있고, 죄악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날카로운 독 이빨을 가지고 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평하는 데 익숙하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날카롭게 물어 뜯는 경우가 많다. 이제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은 제발 하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사람을 사랑하였으면 한다. 그가 누구라도, 어떤 허물이 있더라도 사랑하였으면 한다. 이웃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님처럼 대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았으면 한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곳에서 신앙생활하는 행운을 나는 누리고 있다.
미국의 한인교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유명한 설교, 말만 잘하는 설교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말고, 교회가 아니라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