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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23. 2019

땅 끝은 어디인가?

성경 속 선교 읽기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롬 15:23)


어떤 분이 질문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재 복음이 어느 정도 전파되었고, 우리에게 남겨진 부분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 갑자기 그 질문을 받으니 조금 난감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과연 그 성과는 어떠한가? 한 세기 전만 해도 세계 복음화는 곧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했다. 1) 한때 우리나라에서 선교와 전도에 관심을 둔 분들이 민족 복음화라는 거창한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 의도는 선하고 아름다웠지만, 현재 그 결과는 처참하다. 2) 과연 세계 복음화는 가능한가? 

문제는 우리가 지나치게 성과 위주 사고방식을 가진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결과로만 판단하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3절에서 자신이 이 곳(그리스와 터키)에서 일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다. 누가 보아도 그가 사역했던 지역에 복음이 다 전파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곳 교회들은 이제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약한 교회요,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생활 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초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였을까? 3)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울이 로마로 그리고 멀리 스페인으로 가기 위한 자기 정당화 논리인가? 그는 복음을 마구 흩뿌리기에만 매달린 사람인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울을 오해한 것이다. 바울은 사역 현장에서 선교적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아볼로나 디모데나 아니면 다른 신실한 제자들이 그 사역을 감당하고 더욱 확산할 것을 믿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공동체를 이루는 초석을 놓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믿었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선교뿐이겠는가? 우리의 모든 일, 그것이 선교이든, 봉사이든, 교회 사역이든, 심지어 개인적인 직업이나 목표나 비전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모두 허사이다. 유진 피터슨은 히브리인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이점을 설명한다. 히브리인은 하루를 저녁에서 시작하여 다음 날 저녁까지로 보았다. 그들의 하루는 잠자리에 들면서 시작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이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동참하라고 요청하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외쳤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모세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니 우리는 수동적으로 앉아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할 때든지, 평화 시기든지 어느 때든지 하나님은 왕이시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잘못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생각이다.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이 통제권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열매나 성과도 자신의 것이고, 책임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우리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첫 번째 주신 계명은 안식하라는 것이다. 그 말은 모든 일을 멈추고 쉬라는 뜻이다. 그것은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손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안식하면서 주되심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다(요 19:30). 그 말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인류 구원을 완성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 구원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모두 맡기셨다. 예수님의 이루심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맡기심이다. 그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3년 동안 예수님에게 제자 훈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 도망쳤던 자들이다. 그런 연약한 자들이다. 배움도 짧고, 용기도 부족하고, 서로 용납하는 태도도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그것은 제자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제자들이나 바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울은 스스로 심는 자라고 하였다(고전 3:6). 심는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그다음은 다른 사람이 맡을 것이고, 그다음은 또 다른 신실한 사람이 맡을 것이다. 바울의 땅끝은 지리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맡겨준 자리와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감당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땅끝이다. 그가 로마로 가든, 스페인으로 가든 어디로 가든 그는 맡겨진 사명을 지금 있는 곳에서 하던 것처럼 똑같이 할 것이다. 바울의 땅 끝 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따르는 사상이다. 


당신의 땅 끝은 어디인가? 혹시나 분수에 넘치게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를 외치면서 자신의 자리에서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가? 세계를 나의 교구로 달라는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 현재 삶의 자리가 곧 땅끝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루를 살아가며, 이곳에서 선교적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 그곳이 유대든 사마리아든 땅끝이든 어디든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선교사가 될 것이다. 


1)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는 선교 상황의 긴급성을 강조하였다. 세계 복음화가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생각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2) 민족 복음화는 커녕 세상에 손가락질 받고 비판받으며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어 유리 방황하고 있다. 

2) 레슬리 뉴비긴의 ‘오픈 시크릿’(복 있는 사람)을 참고하였다. 

3) 마르바 던의 ‘안식’(IVF)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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