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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12. 2019

예언은 현재를 겨냥한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기억은 다른 시간에 산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전 역사를 품고 현재에 산다는 뜻이다” - 헨리 나우웬


예언자들이 과거를 소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예언자들은 고칠 수 없는 과거를 집착하는 신경증 환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과거를 소환하여 현재에 가져다 놓는 이유는 그래도 아직 치유 가망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약은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좋은 이야기나 화려했던 역사를 기록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신앙의 선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성경 인물들의 약점과 잘못과 죄악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좀 숨겨주고, 덮어주고, 못 본척하면 안 되었을까? 그들이 역사를 기록한 이유는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과거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기록한 것은 단 한 가지 목적때문이다. 역사를 읽는 후배들이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선지자들은 예언함으로써 과거를 소환하여 현재를 치료하려고 하였다. 죽어버린 과거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예언이다. 선지자들은 암울했던 과거가 반복될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하였다. “예언자들은 과거에도 관심이 있었고, 미래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현재에 가장 큰 관심을 두었다”(Limburg, 90). 


“예언자들은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의 정치적 조류와 전혀 무관한 '비 속세적'이거나 혹은 ‘신령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 그들은 당대의 사회적 불의와 부정에 대해 과감하게 지적하고 소리 높여 개혁을 부르짖었다”(류호준, 30). 아모스가 사역하던 때는 번역과 사치의 때로서 백성은 죄악을 탐닉하였다. 겉보기엔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지만, 영적으로는 극도로 타락한 사회였다. 아모스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을 토하듯 쏟아내었다. 그것이 바로 예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웃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왕이었으나 나라가 부강해지고 편안해지자 교만하여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 나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죽음과 이사야의 소명은 묘하게 얽혀 있다. 웃시야의 삶과 죽음은 곧 이스라엘의 모습을 반영한다. 점점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조국을 바라보며 이사야는 가슴이 무너졌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지자에겐 보이는데, 눈이 어두운 이스라엘은 보지 못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은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켜보며 눈물짓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보다도 현재를 겨냥하였다. “예언자들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세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다”(류호준, 41).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2,000년 후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힘쓰지 않았다. 딘 플레밍은 요한계시록의 현재성을 강조하여 말했다. “새 예루살렘이 교회의 현재 삶 및 선교와 별로 관련이 없고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의 미래 운명에 대한 모습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해줄 말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거룩한 도성이 미래에 속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현재 정체성과 선교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는 실제에 대한 비전을 제공한다.”(Flemming, 256)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미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면, 조금 서글퍼진다. 그러나 혹여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단지 지적 유희로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종말은 이야깃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재를 위한 심각한 메시지다. 과거 이스라엘이 변화를 싫어한 것처럼, 혹여나 현재 그리스도인도 변화를 싫어하여 종말을 자초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설교를 들으러 가서도 우리의 안락한 믿음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변화의 촉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질문이 거의 없고 그래서 얻는 것도 적다”(Brueggemann, 11).


“모든 예언적 말씀은 그것이 말해진 당시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미래에 관한 경고와 격려에 의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재에 충실하도록 요구받았다”(Green, 65). 역사의 운전대를 잡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실 세계로 뛰어들어오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미래나 종말을 운운하면서, 현실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서 하나님 나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는 데 불순한 의도가 섞여서는 곤란하다. 성경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실존하는 내 삶의 변화, 현재 교회 공동체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현재적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마22:32). 만일 그리스도인이 현재 상황이 암울하다고 미래만 바라보며 환상만 꿈꾼다면, 하나님은 다시 역사의 커튼을 찢으셔야 할지도 모른다. 변화를 거부하고 멸망을 자초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선지자들은 불을 뿜는듯한 열기로 예언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가슴 터지라 외쳤다.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 친히 들어오셔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교회의 머리 되심은 특별한 뜻이 있다. 그것은 멀리 하늘나라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이 땅의 교회와 함께 울고, 함께 고통받고, 함께 고민하며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뜻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여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창조로부터 지금까지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과거)를 돌아보며, 장차 완성하시고 이끌어가실 하나님의 새창조(미래)를 내다보면서 (현재) 이곳에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야 한다. 유진 피터슨은 현재 미국 교회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말을 하였다. “현재 미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미국의 길로 바꾸느라 너무나 분주하다.” 이 메시지는 오늘 한국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교회이다.  그리스도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단지 종교단체일 뿐이다. 


1. Limburg James, ‘예언자와 약자’, 이군호 옮김, 대한기독교출판사, 서울, 1981년

2. 류호준, ‘아모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경기, 2003년

3. Green Joel B. , ‘어떻게 예언서를 읽을 것인가’, 한화룡 옮김, IVP, 서울, 1992년

4. Flemming Dean, ‘신약을 선교적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화룡 옮김, 도서출판대서, 서울, 2017년

5. Brueggemann Walter, ‘마침내 시인이 온다’, 김순현 옮김, 성서 유니온, 서울, 2018년

6. Nouwen Henri, ‘춤추시는 하나님’, 윤종석 옮김, 두란노, 서울,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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