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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17. 2019

예언은 미래를 희망한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희망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나아갑니다. 궁극적으로, 희망은 신적인 에너지이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지성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차라리, 희망이 우리를 사용합니다.” - 신시아 부조


요한계시록은 희망의 편지다. 로마의 압제와 핍박 아래 신음하던 초대교회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가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로마의 박해가 가해오는 가장 큰 위협은 박해를 피하고자 로마의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유혹이다(계 2:14-16, 20-23, 3:1-3, 15-19).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를 로마 제국의 사고방식과 문화에서 떼어놓으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함이다(Nissen, 246-247).


그것은 출애굽의 상황과도 같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중에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불신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불평하고 원망하였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희망을 외면하였고, 오직 현실의 부정적 모습만 보며, 세상(애굽)만 보았다. 그러나 모세와 경건한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였고, 결핍과 부족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면서 새롭고 좋은 땅을 향해 가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희망의 역사였다(Brueggemann, 2013, 89). 


성경의 역사는 늘 이런 식이다. 하나님의 희망이 어디 보이느냐 조롱하면서 현실적이 되자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벧후3:3). 그들은 주장하기를 희망이란 일어날지가 의문스럽고 불확실함을 뜻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확신이 없기에 희망하지, 확신이 있다면 굳이 희망할 필요는 없다(Roer-Pol DROIT & Monique ATLAN, 75). 그러므로 희망은 사실상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신학자 중에도 희망은 종말에 관한 관심을 자극하므로, 현재보다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먼 미래만 내다보며 사변적 논쟁만 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슈바이처나 불트만 같은 학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우주의 대파국이 임박했다는 종말 사상에 빠져 있었다고 생각하였다(Horsley, 11).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하였고,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도 오해하였다. 묵시문학(요한계시록)의 중심 메시지는 제국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확신시키며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이었다(Horsley, 123). 

세상의 희망은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하지만, 말씀(예언)의 희망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의미 있게 살게 하는 힘이다. 요한계시록은 어렵고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여 먼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유혹과 위협 아래 살아가는 기독교 공동체에 희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신앙을 유지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조하고, 세상에 빛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생산적인 희망이다(Beach, 204). 


문제는 우리 자신이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없고, 그것을 만들어 낼 능력 또한 없다(Bourgeault,31). 희망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자비롭게도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찾아 주시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던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신다. 선지자들의 긍정적 역사는 하나님의 희망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도 계시며, 낮은 곳에도 계시고, 내 몸 안에도 밖에도 계신다.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과거에도 역사하셨고, 현재에도 역사하시고, 미래에도 역사하실 것이다. 선지자들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일깨움으로써, 현재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으며, 미래를 내다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희망은 살아 있음의 속성이다. 희망은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힘이다. 예언의 희망은 단순한 상상이나 소망이 아니다. 이 희망은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역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의지한다. 선지자들이 희망을 찾기 위해 과거를 소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희망은 어떤 상상이나 망상이 아닙니다. 희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데 모여 그 길을 찾게 해주는 음파탐지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있는 구성원으로서 우리 마음을 내어줄 수 있고, 공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이 음파탐지기로 우리가 진정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다면, 희망은 다시 한번 개인적인 차원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까지 우리가 진실로 바랐던 미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은 살아나며 번창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을 것입니다”(Bourgeault,127). 


부르그만은 세례의 의미를 기독교 공동체와 희망을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세례는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희망을 품은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공식적 과정이며, 세상에 눈을 돌리지 않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며 답을 찾을 수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답(대안)을 제공해준다. “죽음이라는 옛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부둥켜안는 세례는 우리를 세상의 최종 모습에 관한 대안적 희망으로 초대하고 편입시키는 행위다”(Brueggemann, 2018, 129).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세속 권력과 손잡고 이 땅에서 기독교 제국을 건설하려는 거짓된 희망을 물리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그리스도인을 연합시키며, 우리가 실수하고 회개하고 개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전진하게 한다(Guder, 105). 그러므로 최악의 상황에서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던 초대교회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며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세상을 향해 우주적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미래에 대한 강렬한 희망은 죽음도, 핍박도, 유혹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하였다.


1. Bourgeault Cynthia, 희망의 신비(Mystical  Hope), 김형욱 옮김, 서울 : 비아, 2015년

2. Nissen Johannes, 신약성경과 선교(New Testament and Mission), 최동규 옮김, 서울 : CLC, 2005년

3. Brueggemann Walter, 성경이 말하는 땅(The Land), 정진원 옮김,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년

4. Brueggemann Walter, 마침내 시인이 온다(Finally Comes the Poet), 김순현 옮김, 서울 : 성서유니온, 2018년

5. Roer-Pol DROIT & Monique ATLAN,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L’espoir A-T-Il un Avenir?), 김세은 옮김, 서울 : 미래의 창, 2016년

6. Horsley Richard A. 서기관들의 반란(Revolt of the Scribes : Resistance and Apocalyptic Origin), 박경미 옮김, 고양 : 한국기독교연구소, 2016년 

7. Beach Lee, 유배된 교회 (The Church in Exile). 김광남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년

8. Guder Darrell L., 증인으로의 부르심(Called to Witness), 허성식 옮김, 서울 : 새물결플러스,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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