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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26. 2019

사랑이 없으면 3

“진짜 못 참겠다! 목사는 사람 아닌 줄 알아!” 

목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목사에게 도전하는 교인은 그래도 봐줄 만하다. 그런데 이유도 없이 무조건 반대하고, 무조건 비판하고, 무조건 욕할 때는 견디기 참 어렵다. 참다못해 신경질을 부리거나 맞대응했다간 그 결과는 비참하다. 목사가 교인과 싸우면, 백전백패이다. 절대 싸워선 안 된다. 그런데 목사의 약점을 알고 끝까지 괴롭히고 싸움을 거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류 최초의 법전이 충고하는 대로 해야 할까? 아니다. 목사라면 절대 그렇게 해선 안된다. 어디 목사뿐이랴.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현실 세계 원수는 나를 괴롭혀도 너무 괴롭힌다. 내가 마치 예수님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끝내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한다. 나는 정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싫다. 이건 나의 경험에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쓴 글이다. 


사실 악의 무리, 사단의 졸개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시편 저자는 너무나 힘들어서 하나님께서 대신 복수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솔직히 시편 저자는 원수를 직접 공격하고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껏 저주와 욕설과 분노를 쏟아냈다. 시편 저자가 원수를 직접 응징하겠다고 하지 않은 것만 해도 훌륭하다.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단체는 비행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파괴하였고, 미국 펜타곤을 공격하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19명의 테러범을 포함해서 2,996명의 사망자와 최소 6,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경제적 피해는 세계무역센터가 11억 달러, 테러 응징을 위한 긴급지출안 400억 달러, 재난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 이외에도 각종 경제활동이나 재산상 피해를 더하면, 그 가치를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위키백과, 9.11 테러)

미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기독교는 어떻게 가르쳐야 했을까?

이슬람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 막고 있어서 공격받지 않을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9.11 테러는 충격이었다. 세계 최대 군사 대국 미국은 가만있지 않았다. 적이 한 대 치면 백 대를 쳐서 다시는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여야 했다. 군사강국의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가르쳐야 했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가미가제 특공대를 파견했을 때나, 나치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을 때나, 9.11 테러를 당한 미국을 향하여 기독교가 가르친 것은 놀랍게도 똑같다. “원수를 섬멸하라!” “이런 악한 행위의 책임자를 반드시 찾아 심판하라!” 


이슬람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테러는 거룩한 전쟁이다. 자살 폭탄 테러는 알라께서 기뻐하시는 순교로서 큰 축복이 있을 것이다. 과거 십자군 전쟁 때 기독교가 가르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거룩한 희생이다. 소위 거룩한 전쟁이다. 

진짜 기독교는 어떻게 가르칠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이슬람 테러단체나, 십자군을 모집하던 가톨릭이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상이나 유익이 없다. 기독교는 원수(사단)의 도발에 사단적 방법(폭력적 방법)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방법(사랑)으로 원수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원수는 테러하고 승리를 축하하였을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언제나 동일하다. 이건 명백히 자기들이 제일 잘하는 짓인 폭력으로 싸워보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예수님은 사단의 위협과 공갈과 협박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사단의 폭력적 방법에 휘둘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대응하셨다.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셔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기도하셨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심을 보여줌으로 결국 사랑의 방법이 승리하였음을 증거한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전쟁의 근원은 두려움이다”라고 하였다. 원수를 두려워하면, 원수의 방법을 두려워하면 우리의 방법을 포기하고 원수의 방법으로 대응한다. 칼에는 칼, 총에는 총이다. 적이 핵을 하나 가지면, 나는 핵을 백 개 가져야 한다. 결국, 기독교의 가치를 포기하고, 원수가 좋아하는 가치에 집중한다. 두려움은 무기를 끝이 없도록 쌓아놓게 한다. 지금 중동은 전 세계 최첨단 무기의 집합소이다. 중동만큼 무기를 많이 쌓아놓는 곳이 있다면, 그건 한반도이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에 저항하는 행동이다. 믿음의 사람에게 용기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의 치유이며, 우리가 가장 먼저 치유해야 할 질병은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치유한 뒤에야 비로소 평화를 위한 진전이 가능하다”(Jim Wallis, 133). 


그리스도인은 적을 두려워하여 공포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예수님의 방법인 사랑을 포기해선 안된다. 사랑이 없는 전쟁은 결코 거룩한 전쟁이 될 수 없다. 사랑 없는 희생은 의미가 없다. 그것이 순교자처럼 불살라질지라도 의미 없다. 사랑 없는 희생, 사랑 없는 구제, 사랑 없는 순교, 어느 것도 유익하지 않다. 예수님은 목적과 수단, 모양과 동기에서 사랑을 요구하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랑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그 동기는 불순하였다. 


소위 ‘거룩한 전쟁’은 거룩한 목적을 내걸고 희생을 요구한다. 그 희생은 타인을 죽이는 일이요, 자신도 죽는 일이다. 그걸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좋고, 목적이 좋다 해도 방법에 사랑이 없다면, 그건 유익이 없다. 


그런 면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 실천하기 어렵다고 포기하여야 할까? 하나님 나라를 이룰 힘과 지혜가 없다고 포기하여야 할까?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였다고 교회 공동체를 포기해야 할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작은 시도, 작은 출발, 작은 노력을 요구하신다. 넘어질 때 넘어지더라도 한 번 실천해보자. 꺼져 가는 등불을 절대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발자국이라도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가자.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1. Jim Wallis, 하나님의 정치(God’s Politics), 정성묵 옮김, 서울:청림출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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