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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06. 2019

사랑은 무엇일까? 2

사랑은 온유하며

어느 날 아버지는 머뭇거리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배 목사. 내가 이런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을 많이 했어.”

“경숙이가 내 양복을 훔쳐갔어.”

“예!!!”

경숙이는 둘째 여동생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는 동생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경숙이가 사다 주었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언제든 양복을 해드렸다. 그런 여동생이 양복을 훔쳐갈 리가 없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피식 웃기만 했다. 훔쳐 가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가 치매가 막 시작하던 때였는데.


내가 아버지와 대화를 자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처럼 아버지의 말을 무시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때 그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비록 말이 안 되어도 조금만 더 진지하게 들어주고, 관심 가져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소리를 하면서 아버지는 점점 더 외로워지시고, 치매는 더 심해졌다. 생각해 보면 내 잘못이 크다. 남의 말, 특히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어렵다.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이 하모니카 연주를 한다고 초청하신 집사님이 계셨다. 조그만 카페에서 하는 음악회였다. 음악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20살이 넘은 아들은 마치 초등학생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말은 좀 서툴긴 하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집사님 아들만큼 밝은 얼굴로 그를 대하였다. 아들이 하는 이야기에 머리를 숙여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태도만 그렇게 하였지, 온 마음으로, 진심으로 대하진 않았던 것 같다. 


연애할 때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곤 한다. 20년 넘게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에 성격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지만 경청하는 태도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이해하려 하고, 들어주려고 하는 진심이 통하면 서로 결혼까지 골인한다. 그러나 결혼한 지 십수 년이 지나면 신비함과 새로움은 다 사라진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의 다 아는 지경에 다다른다. 태도, 눈짓, 심지어 한숨 소리에 담긴 의미까지 다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신비하게도 마음의 귀를 닫게 된다. ‘아’하면 끝말이 어떻게 될지 알기에 들어보지도 않고 결론부터 내린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궁리한다. 이건 부부 사이에서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는데 온유함이 무엇일까?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맹인 두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마20:30) 그들은 주저앉아 구걸하는 중이었다. 나 같으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돌이켜 소경에게 다가갔다.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으신 예수님은 말하였다. 

“내가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주여 우리가 눈 뜨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만져주시니 그들이 곧 보게 되었다. 


난 여기에서 온유함의 모습을 본다. 온유는 나를 낮추는 것이다. 온유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조금의 선입견이나 판단도 없이 진정성 있게 그를 받아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 필요에 따른 우정이다. 상대방이 필요할 때까지만 지속하는 우정이다. 이른바 거래 관계로 맺어진 우정이다. 


둘째, 쾌락의 우정이다. 서로를 통해 즐거움을 맛볼 때까지만 지속하는 우정이다.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할 때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 모두는 쾌락에 따른 우정 관계였다. 


셋째 선한 우정이다.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있는 덕을 발견하는 사람이 누리는 우정이다. 서로의 인격, 취향, 품성, 언행, 태도를 통해서 서로를 존중하는 우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최고의 우정은 대등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대등하지 않은 관계의 우정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친구로 삼으셨다. 절대 대등한 관계가 아닌데 친구로 삼으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와서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들어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죄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셨다. 사람들이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노예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셨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핏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다. 간음하다 현장에 사로잡힌 여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셨다. 


지체 장애인, 정신지체인,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손가락질받는 죄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이라는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홀로 있기가 어려워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를 찾는다. 자기 외로움을 달래려 해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사람들마다 모두 귀를 열기보다는 입을 열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은 닫으면서 남의 마음은 열기를 원한다. 


온유함은 무엇일까? 수준이 안 맞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데, 나와 생각이 다른데, 나를 욕하는 데 그에게 다가가 마음 문을 열고 진심으로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장 바니에는 말하였다. 사랑은 특별히 영웅적인 일을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일들에서 온유를 실천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당신보다 더 실력이 있다 입증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내가 당신보다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그냥 받아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하다. 죄인을 받아주었고, 소경 거지를 받아주었고, 간음한 여인을 받아주었고, 종들의 소리를 받아주었다. 그냥 받아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서 귀 기울여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었고, 진심으로 그들을 받아주었다. 


교회 공동체란 매일 서로에게 보여주는 따스한 관심으로 이루어진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합니다.’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작은 몸짓, 태도, 마음가짐으로 만들어갑니다. 자신을 낮추고, 마음 문을 진심으로 여는 온유함에서 나오는 섬김과 희생이 있을 때 진정 하나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나를 밟고 더 올라서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온유한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고 영광의 보좌에 앉게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세워주는 사람, 온 마음을 다해 상대방의 소리에 선입견 없이 귀 기울여주는 사람. 그가 온유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행복과 기쁨을 나눠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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