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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17. 2019

하늘 전망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남산 타워에 모시고 가는 적이 있다. 서울에 처음 온 손님인 경우는 예외 없이 남산 타워로 간다. 도시는 밤에 빛난다고 누가 말했던가. 타워에서 바라보는 서울 야경은 언제 보아도 가슴 뛰게 한다. 한눈에 서울 전체를 보면서 한강과 여의도와 북한산과 내가 사는 동네를 가리키며 서울 이야기를 한다. 역시 도시를 보려면 제일 높은 곳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야 방향도 지리 감각도 익힐 수 있다.


류호준 교수는 그의 책 ‘일상 신학 사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가장 좋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전망대가 필요합니다. 신학에선 그 전망대의 이름을 ‘종말론’이라 부릅니다. 끝에서 보면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류호준, 352).


요한계시록 4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하늘로 초대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듣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 4:1).

하늘 문이 열리는 순간을 한 번 상상해보라.


어릴 적 커다란 장롱 속에 들어가 놀던 기억이 있다. 그곳은 자기만의 공간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둡고 신비한 장소이다.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를 신비한 옷장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루시가 옷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알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는 데 그곳은 ‘나니아’라는 곳이다. 판타지 문학은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사도 요한을 초청한다.

“이리로 올라오라”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혹은 능력으로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합리성과 논리를 가득 채운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2,000년 전 고대인이 되어 상상해보라.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울까?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한다.

“요한 사도님! 무엇을 보았나요?”

“이야기해주세요.”


지금부터 사도 요한은 본격적으로 자기가 하늘에서 본 이야기를 전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도 요한은 왜 하늘로 부르셨을까? 그저 하늘의 신비한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라고? 남산 타워에 외부인을 데려가는 이유 중 하나는 서울이 얼마나 크고 발전된 도시인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땅과 하늘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하늘이 얼마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지 자랑하고 싶어서 부르셨을까? 하나님은 인간처럼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사도 요한도 비록 하늘에 올라가는 신비한 경험을 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이 땅에서 고통받고 핍박받고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도 사도 요한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내뱉는 신음 소리, 한숨 소리,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출 6:5).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어 하나님 나라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하늘로 부르신 이유는 현실 세계를 객관적으로 조망해 보라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4~5장은 앞으로 전개될 나머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바라볼 수 있는 하늘 전망대로서 기능을 담당한다(이우재, 235). 하늘 전망대에 서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식견을 가지게 된다. 앞으로 다가올 고난과 핍박, 재앙과 심판, 종말을 좁은 인간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된다.


사도 요한이 하늘에 올라가서 제일 첫 번째로 본 것은 ‘보좌’이다. 보좌는 요한계시록 4장부터 끝까지 43회 나타난다. 4장과 5장에서만 19회가 나타난다(Gorman, 205). 하늘의 보좌는 요한계시록 전체를 열어주는 열쇠이다.


땅(현실세계)에서는 보좌가 로마에 있다. 그것은 짐승의 보좌다(계 13:2,16:10).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힘이 있고 부유해 보이지만,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하다. 진짜 보좌에 앉을 자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보좌는 단지 영광과 권위의 자리만 상징하지 않는다. 보좌는 역사를 주관하고 이끄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란 뜻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누가 어떤 짓을 해도, 아무리 비웃어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신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캄캄하고 답답하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때가 있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박해와 탄압에서 신앙을 저버리고 변절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야만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정복하고 교회를 파괴할 때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중세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면벌부를 판매하며, 권력과 종교가 한편이 되어 백성을 괴롭힐 때도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란 허울 좋은 명분으로 백성을 전쟁터로 끌고 가 무고히 죽고 죽일 때도 있었다. 세상의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선교라는 깃발을 내세워 군대보다 앞서 식민지로 들어가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말이 선교이지 사실 식민지 개척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현재 한국 교회 역시 과거 기독교 역사의 암울하던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에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차라리 교회는 문을 닫고 기독교는 없어지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니체가 그런 말을 했고, 볼테르가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하늘 보좌에서 인류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자리에 올라가면 시선이 달라진다. 짧은 순간의 시선이 아니라, 인간의 작은 머리로 하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때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찬송이 된다. 24 장로와 네 생물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우리 주님, 주권자이신 하나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계 4:8, 메시지 성경)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이 찬양을 만약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다운 화음과 소리는 뒤로하고 그들이 정말 기쁨에 겨워 감격하여 부르는 모습만으로도 감동 또 감동했을 것이다.


이제 24장로는 자기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을 벗어 보좌 앞에 내려놓으며 찬양한다.

“오, 합당하신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

영광을! 존귀를! 권능을 받으소서!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셨기에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드린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자랑하던 헌신과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에게 속한 신하임을 고백하며 영광 찬양 송을 올린다. 우리도 그렇게 찬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5장에 보면 찬양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에게서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다. 사실 사도 요한이 하늘나라로 부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분은 예수님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엮어낼 줄 아시는 분이시다. 보고 싶은 사람을 금방 보여주지 않는다. 배경 음악을 깔고, 작은 북소리를 두두 둥 울리면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등장한다. 마치 헤어진 이산가족이 다시 만날 때 아들은 목 노아 외치는 것과 같다. “어머님! 보고 싶습니다!” 사도 요한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적은 있었지만, 하늘 영광 보좌에서 영화로우신 주님을 뵌 적은 없었다. 주님의 모습은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상징적 표현을 사용한다. 주님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 뿔이 능력을 상징한다면, 눈은 통찰력을 의미한다. 완전한 능력, 온전한 통찰력으로 세상을 꿰뚫어 보시고, 교회를 살피시는 주님이시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값 주고 산 교회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반드시 다시 회복하시고, 반드시 영광의 자리에 다시 앉히실 것이다. 어린양이신 주님은 역사의 두루마리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다. 그 역사하심은 곧 구원이요, 축복이요, 은혜요, 사랑이다.


4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5장에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이번엔 찬양대 구성원이 조금 더 늘어난다. 24장로는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찬양한다.

“합당하십니다!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그 봉인을 떼소서.

죽임 당하신 분! 주님은 피로 값을 치르시고 사람들을 사셨습니다.

그들을 온 땅으로부터 다시 데려오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로 다시 데려오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한 나라와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온 땅을 다스리는 제사장 -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계 5:9-10, 메시지 성경).


이어서 수천 수백만 천사들이 큰 소리로 함께 찬양한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합당하시다!

권능과 부와 지혜와 능력을 받으소서!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소서!”(계 5:12, 메시지 성경)

헨델은 이 부분을 그의 위대한 찬양곡 ‘메시아’에 그대로 사용했다. 잘못된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끔찍하고 잔인한 책으로 이해하지만, 시와 찬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음악가는 이 부분에서 위대한 영감을 받아 아름답고 웅장하고 거룩한 찬양곡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다가 어려워지고, 지나친 공포와 미신적 두려움이 밀려와 미궁 속으로 빠져들 때마다 반드시 이 하늘 전망대에 올라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다시 재조정해 볼 필요가 있다"(이우제, 236).


하늘과 땅, 땅 밑과 바다의 모든 창조물이, 모든 곳의 모든 목소리가 다 함께 한 목소리로 피날레를 열창한다.

“보좌에 앉아 계신 분께! 그 어린양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토록!”(계 5:13 메시지 성경)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없다면, 그는 크리스천이라 말할 수 없다. 이 찬양을 들은 사도 요한은 확신했다. 그 확신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세상이 아무리 캄캄해도, 교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하나님의 역사 하심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보좌 위에 앉으신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그것을 증거 한다.

우린 승리하리라!


1. 류호준, ‘일상 신학 사전’ 서울 : 포이에마, 2013년

2. 이우재, ‘하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현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우주석) 서울 : 두란노, 2009년

3. Gorman Michael J.,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Reading Revelation Responsibility), 박규태 옮김, 서울 : 새물결플러스,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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