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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19. 2019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은 복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7강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렸다. 세계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세계 여러 나라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조선의 황제 고종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 조선을 대표하여 체결하였다. 고종은 조약이 불법으로 체결된 지 4일 뒤 헐버트 선교사를 만나 간곡히 부탁하였다.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 이후 뜻이 있는 조선인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며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마침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이 모여 평화를 논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헐버트가 함께 헤이그로 갔다. 비록 초청받지 못했지만 ‘평화’를 논한다는 자리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 


평화를 논한다고 하였지만, 말만 그럴듯하였지 실상은 세계열강이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구획을 정하여 식민지를 집어삼키자는 뜻이었다. 일본의 간악한 계교와, 열강의 욕심이 합하여 조선 대표는 ‘만국 평화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초청받지 못한 자의 설움, 외교권을 빼앗긴 자의 억울함이 가득하였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네 번째 복이 나온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9;9).

유대인에게는 메시아 잔치 사상이 있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큰 잔치에서 하나님의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Barclay, 476).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 잔치에 참석할 자는 누구였을까? 그 잔치에 참석할 자는 순수 유대인, 그중에서도 유대의 규례와 전통을 철저히 지킨 사람만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메시아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좌석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계 7:4)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메시아 잔치 자리에 참여할 자를 매우 제한적으로 생각한 결과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9-10) 

메시아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이다. 예수님도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마 8:11)

사도 요한이 말한 144,000명은 문자적으로나 숫자로 풀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풀어야 마땅하다. 

예수님은 잔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는데 잔치 시간이 되어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주인이 노하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아가 가난한 자, 병신, 소경,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였다. 그래도 자리가 차지 않으니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 하였다.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 예의를 갖추어 초청장을 받은 사람이 복이 있는가? 아니면 비록 정식 초청장은 받지 못하였지만, 뜻하지 않게 권함을 받아 잔치 자리에 참여한 자인가?


사도 요한은 정식 초청장을 받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어떤 모양으로든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 앞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해도, 친구 따라 은근슬쩍 들어왔어도, 강권하는 손길에 의해 마지못해 왔어도 들어온 자는 복이 있다. 


하늘 천국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고자 지금도 참고 또 참으신다. 마침내 하나님의 참으심은 빛을 발하여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천국 혼인 잔치 자리에 참여한다. 요한이 본 이 놀라운 환상은 지극히 미약한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지금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지금은 문제가 많지만, 선교도 전도도 열매가 없지만,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마지막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할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이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계 5:9)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 결국 십자가의 승리이다. 고난이 영광이고, 죽음이 생명이고, 십자가는 부활이다. 현재만 보면 소망 없지만, 장래를 보면 희망이 있다. 그래서 난 이 어둡고 캄캄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한다. 


Barclay William, 요한계시록 주석(The Revelation of John), 서울 기독교문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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