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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23. 2019

요한계시록의 시간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는 고정된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방법으로 연대를 계산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에 중심이 있다는 전제로 연대를 계산한다.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우리는 연대를 계산할 때 A.D.(Anno Domini, 주님의 해)와 B.C.(Before Christ)를 사용한다. A.D. 는 라틴어이고 B.C. 는 영어다. 왜 같은 언어를 기반으로 하지 않았을까?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역사에 대한 관념이 오늘 우리와 같지 않았다. 6세기 전반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 470 ~ 544)가 처음으로 A.D. 를 사용하여 연대를 계산하였다. 그때는 라틴어 세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A.D. 는 라틴어였다. 그러다 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대 역사에 관해 관심이 커지면서 그 이전을 표기할 필요가 생겼다. 18세기 대영제국이 크게 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로 B.C. 를 사용하였다. 그러니까 정확한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과 생각은 18세기가 되어서야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대 계산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고정 점을 기준으로 하나는 과거로 다른 하나는 미래로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을 직선으로 생각하는 방식이다. 현대인은 시간을 과거 - 현재 - 미래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뿐 아니라 순환적으로도 보았다. 이집트인들은 하루를 시작하고 한 해를 시작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파라오가 등극하는 것을 새로운 시간이 창조되는 시기로 여겼다(배철현, 10). 그들은 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하였다. 하루의 순환, 한 해의 순환, 계절의 순환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의 시간관은 연극에 비유할 수 있다. “연극 원작은 고정되어 불변하지만, 그 연극의 공연은 새로운 배경과 연극배우들에 따라 다르게 연출된다”(배철현, 10).

시계도 없던 시절 고대 유대인의 시간관은 어떠했을까? 성경을 통해서 살펴본 그들의 시간관은 현대인이나 이집트인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시간을 선형적으로도 보았지만, 시간과는 조금 다른 개념의 ‘때’(kairos,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때) 개념이 있었다. 그들이 역사의 흐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고대 선지자들은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였다. 연대의 순서나 인과 관계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아래 있다. 


그레엄 골즈워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대 유대인의 시간관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적 관점이 아니다. 오히려 언약적 관점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자신을 창조주와 역사의 주인으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은 분이시다. 시간과 역사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역사 안의 그 어떤 것도 의미 없다(Goldsworthy, 75-76). 


고대인들에게 시간관념, 역사 관념이 얼마나 있었을까? 우리가 익히 아는 ‘시간은 금이다’는 속담을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간은 넘쳐나는 것이었다. 현대인처럼 바쁘게 살아야 할 것도 없고, 분초를 쪼개가면서 아귀다툼할 일도 없었다. 그저 먹고살면 충분한 것이 고대인의 삶이었다. 


그런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으면서 시간에 의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비롯한 고대 유대인에게 가장 큰 관심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시간의 질, 시간의 의미였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카이로스(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때)로 이름 하였다. 폴 틸리히는 ‘카이로스는 질적으로 다르고 독특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카이로스를 영어로 풀면 timing이 가장 적절하다고 하면서 카이로스는 ‘God’s timing”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알맞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간,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카이로스는 알맞은 순간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선택한 특수한 순간이요, 시간과 역사가 성취하는 때이다. 역사의 성취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나타났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위대한 카이로스(the great kairos)이다(Brown, 158).


요한계시록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직선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의 시간은 마구 뒤엉켜 있다. 요한은 반복과 점진적 강조를 섞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 하심, 하나님의 주관 하심,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완성하시는 때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거룩한 의미로 충만하다.  


1. 배철현, ‘이집트인의 시간관과 연대측정’(말씀터, 52호), 의정부 : 한님성서연구소, 2007년

2. Goldsworthy G., ‘복음과 요한계시록’(The Gospel in Revelation), 김영철 옮김, 서울 : 한국성서유니온, 1991년

3. Brown D.M., ‘폴 틸리히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Tillich in Dialogue), 이계준 옮김,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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