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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소통하는 복음

by Logos Brunch

초대 교회 사도들은 크리스천에게 복음을 전했을까 아니면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했을까?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다. 당연히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이다. 불신자들에게 기독교 용어(당시 기독교 용어가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로 복음을 전했을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세상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을까? 당연히 세상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슬람은 코란의 정경성을 아랍어 코란에만 둔다. 그들은 번역된 코란의 정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번역을 인정하였다. 번역을 인정한다는 뜻은 새로운 언어 체계와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헬라 세계에 복음을 처음 전할 때 사도들은 히브리어로 전하지 않고 헬라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체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 철학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신학을 정립하였다.


조선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서양 선교사들은 복음을 그리스도인에게 전했을까? 아니다. 불신자에게 전했다. 그렇다면 불신자인 조선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 복음, 언약, 하나님, 하나님 나라, 구원, 어느 것도 아는 사람이 없는 불신 조선인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 초기 선교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불교, 유교, 도교를 공부했는지 알 수 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그마한 접촉점이라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기독교 용어가 단 하나도 없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조선인들이 사용하는 종교 언어를 차용하여 복음을 전했다. 말씀은 도(道)라고 하였고 하나님은 천주(天主) 혹은 상제(上帝)라고 하였다. 초기 번역된 성경을 보면 선교사들의 고민이 절절이 묻어 있다.1)


종교개혁자 칼빈은 1559년 제네바 신학교(Genevan Academy)를 오픈하였다. 교회의 통제를 받는 제네바 아카데미는 기초 교육과정인 schola privata와 상급과정인 schola publica를 개설하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제네바 커리큘럼을 살펴보면 인문학이 70%를 차지하였다. 신학교 입학 전 16살까지 가르치는 기초 과정 교과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식 신학 과정인 상급과정 schola publica도 인문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히브리어 교수는 아침에 주석과 함께 구약을 해설하고, 오후에는 히브리어 문법을 강의하였다. 헬라어 교수들은 오전에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플라톤 혹은 플루타르크 혹은 어떤 기독교 철학자들의 작품을 가지고 도덕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헬라 시인, 연설가, 혹은 역사가의 작품을 가지고 강의했다. 이 과정에서 헬라어 교육은 기초과정과 달리 헬라어의 문법이 아니라 저서들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교양과정 강의는 오전에 어떤 자연과학 작품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키케로의 가장 유명한 ‘연설’ 혹은 ‘연설론’의 책들에 대하여 박식하게 가르쳤다”(이은선, 76).


심지어 인문학을 사용하여 헬라어를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인문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복음은 세상에 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복음의 복음 됨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자기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학 용어,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며 은혜를 나눌 수도 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복음이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마치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이 될 뿐이다. 복음은 교회 안에서만 능력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신 세상에서도 능력 있게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막무가내식 복음 선포가 아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 한국 교회 처음 선교사들,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인정한 것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인문학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이다.


어느 분이 이번에 출간한 나의 책 ”성경 속 노마드’를 읽고 이렇게 결론 내렸다.

“기독교 신앙이 인문학에 오염되면 기독교는 죽는다!!!”

나의 책이 순수하게 성경을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치게 인문학을 사용였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기독교 신앙이 지금 인문학을 몰라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소외되고, 세상에 복음 전할 기회를 상실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초대 한국 선교사들이 유교, 불교, 도교를 공부했듯이, 현대 한국 기독교는 세상의 학문을 철저히 연구해서 복음을 그들이 알아듣는 말과 언어로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와 함께 사역했던 G.H. 존스 선교사가 쓴 ‘한국 교회 형성사’(홍성사)를 읽어보면 한국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선교사들의 처절한 노력을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불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은선,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과 교양교육’, 신학연구 제5집 1997년 가을호, 안양대학교, 6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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