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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10. 2019

도망하는 하갈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 16:8)


노예는 소경이어야 한다. 자기 생각, 자기주장, 자기 인권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주어진 환경에 복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세상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렇다’고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자기 생각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의 평가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눈을 감고 사는 사람은 세상이 인도해 주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바울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세상 풍조를”(엡 2:2) 따르는 사람, 즉 옛사람(엡 4:22)이라고 하였다. 하갈은 생각 없이 세상을 살았다.


1961년, 유대인을 학살한 주범 아이히만의 재판이 예루살렘에서 진행되었다. 유대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아이히만은 줄곧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변명하였다. 악은 뜻밖에 너무나 평범하였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죄는 바로 '생각 없음'(unthinkingness)이라고 하였다.

생각 없이 살아가던 하갈은 이제 생각하기 시작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 창 16:4~6을 보면 ‘~눈으로’(베에네~)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한다. “그녀가 자기의 임신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녀의 눈으로”(16:4). “~의 눈으로”라는 단어는 “~의 시각 혹은 관점’을 의미한다(조남해, 45). 여종 하갈은 임신을 계기로 자기의 눈으로 주인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각이 바르냐 틀리냐를 떠나서 그녀가 눈을 뜨고 자기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갈은 이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눈을 뜬 결과는 참혹하였다. 생각하기 시작한 하갈이 받은 수모와 학대는 상상을 초월하였다(창 16:6). 도저히 사라와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갈은 도주하였다. 당시 시대 상황을 볼 때 도망은 파격이었다. 도망한 노예는 죽음뿐이었다. 도망하다 붙잡히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도망하였다. 그만큼 사라의 학대는 지독하였고, 그만큼 하갈은 절박하였다. 도망한 노예 하갈은 이제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홀로 선 존재가 되었다. 도망 노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잡아다 주면 큰 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두려움에 떨며 사람 없는 광야로 숨어든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 16:8). 하나님의 사자는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불렀다. 유니온 신학교의 여성 구약학자인 필리스 트리블(Phylis Trible)은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이 본문을 읽었다. “하갈은 민족, 계급, 성이라는 세 가지 억압을 당하는 인물이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힘 있는 사라의 편을 들었기에, 하갈은 힘이 없었다. 외국인 여성 노예로서 하갈은 이용당하고 학대당하고 버림까지 당하는 죄 없는 희생자이다”(유연희, 109). 트리블은 하나님께서 사라와 같은 입장을 취하며 기득권자의 편에 서 계시다고 보았다. 


그러나 김제성폭력 상담소 하성애 소장은 이 본문을 다르게 읽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하갈, 너는 사래의 몸종이지, 사래의 몸종으로서 네가 견뎌야 했던 그 고통과 억압을 내가 보았고 또 들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지”(하성애, 17).


나는 하성애 소장의 해석을 따르고 싶다. 우리 하나님은 약한 자의 아픔과 고통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와 억눌린 자의 편에 서기를 기뻐하신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설명하시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다(눅4:18,19).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 “네가 어디서 왔느냐”하는 것은 그녀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억압과 학대와 폭력으로 얼룩진 그녀의 과거를 묻는 질문이다. 가슴 아픈 질문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미 다 보고 아시지만, 하갈의 입으로 직접 듣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하갈의 한풀이요 넋풀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 한편 하갈의 내적 치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 “어디로 가려느냐?”하는 것은 그녀의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 도망칠 때부터 하갈은 어디로 갈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갈 곳도 없고 미래도 없었다. 죽음뿐이지만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찾고 나답게 살다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미래를 염려하고 걱정하며 질문하였다. “어디로 갈래?” 하나님의 질문은 그녀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인생의 방향을 묻는 물음이다.


베드로 사도는 불신 남편과 결혼한 초대교회 여성도에게 간곡히 눈물로 호소하였다. 억압과 폭력과 눈물로 지새우는 초대교회 여성도에게 순종을 권면했다. 남편을 떠나면 죽음밖에 없던 그 시대 상황에서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권면은 그것뿐이었다. “죽지 말고 살아라. 살되 그냥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살다 보면, 불신 남편도 마음을 돌이킬 것이다.” 나는 베드로가 눈물로 호소했다고 믿는다(배경락, 139~145)


하나님께서도 하갈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 이 호소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편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도 죽음밖에 없는 하갈에게 기존 질서에 순응하면서 종처럼 생각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 시대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는 하갈에게 주는 하나님의 고민과 충고를 그렇게 쉽게 읽어선 안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하갈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고 하갈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다음 편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남해, '하갈에게서 본 탈북여성들의 희망', 기독교와 통일 8권 2호 33-63, 2017년

유연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구약 논단 제13권 1호 (통권 23집) 101~117, 2007년

하성애, ‘새로 읽는 하갈 이야기’ 한국 여성신학 (48), 7-23, 2002년

배경락,  '성경 속 노마드', 서울 : 샘솟는 기쁨,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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