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
하갈은 줄곧 ‘사라의 여종’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들을 임신했어도 그녀는 '아브라함의' 종이나 첩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라에 속한 종이었다(창 16:6). 그녀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낳아줄 대리모일 뿐이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눈곱만큼도 하갈의 지위를 격상시켜줄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철저히 씨받이 기능을 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 낳는 도구요 수단일 뿐이었다.
한미라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녀는 고향을 떠난 뒤 아브라함 가문의 씨를 계승해 주기 위하여 대리모가 될 수밖에 없는 법률적 약자요, 불행한 여성이었다. 아브람이 지극히 사랑하여 간택한 첩이 아니라 다만 씨받이로서 아브람 가문의 기득권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 정확히 말하면, 같은 여성의 기득권자인 사래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 잠시 대리모로서 이용당한 슬픈 여인이었다”(한미라, 59).
그녀가 아브라함의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은 자신도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나도 사람이다. 설령 잡혀 죽는 한이 있어도,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날은 캄캄하였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에서 며칠을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바로 그런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하갈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의 이름을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누군가를 기억하고 알아준다는 것처럼 고마운 일은 없다. 더욱이 하찮은 노예 소녀인 하갈에게는 이름을 불러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였다.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는 저절로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그녀의 상황과 정황을 자세히 물어보셨다. 비록 성경은 짤막한 대화만 기록하였지만, 하나님과 하갈의 대화는 심도 있었고,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대화였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그동안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다. 난 절대로 하나님께서 몇 마디 하시고 매정하게 다시 사라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 16:11).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다. 사람은 듣지 않아도, 사람은 귀찮아하여도 하나님은 그녀 편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소리에 귀 기울이셨다. 아무리 하찮아도, 아무리 주인집을 도망친 도망 노예라도 하나님은 그녀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하갈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상호 신뢰 관계를 형성하였다. "하나님과 하갈의 상호교감은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이다"(박종수,18). 이제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자신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 16:10).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과 버금간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질 때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6). 아브라함이 자녀가 없어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려 할 때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번성의 약속이나 하갈에게 주신 번성의 약속은 매우 유사하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녀를 씨받이 수단으로 대했지만, 하나님은 하갈에게 새로운 약속을 실현할 귀한 존재로 보셨다. 그녀는 이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할 주체가 되었다(김호경, 85). 세상은 사람을 상품 가치로 평가한다. 상품 가치가 높은 사람이 인정받고 환영받는다. 사람들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그렇다고 치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교회마저, 사람을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삼고 있다. 세상의 경제 논리와 경영 기법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하나님은 상품가치가 하나도 없는 하갈에게 약속을 주시므로 당당한 주체가 되게 하셨다.
지금은 학대받는 존재이고, 하찮은 존재이지만 장차 그녀의 후손은 크게 번성할 것이고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하성애 소장은 “씨”의 의미를 멋지게 해석하였다. “지금은 그녀가 혼자이고 지지자도 없지만, 미래에 그녀는 엄청나게 불어난 자신의 씨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셀 수 없는 많음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압도한다. 희망이 절망을 압도한다. 생명의 씨앗들이 죽음을 압도한다. 이제 그의 과거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그의 미래와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하성애, 19).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뿐만 아니라 하갈에게도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갈에게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존엄과 인격과 의미를 각인시켰다.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녀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 그녀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엘 로이.” "아직까지는 아브라함조차 하나님께 단을 쌓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하갈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최초의 사람이었다"(조남해, 57). "그녀가 하나님께 붙인 그 새 이름은 그녀의 가장 기본적인 신학적 확신(그녀는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었다”(Carolyn,127).
하갈의 하나님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였고 실천이었다.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그 믿음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하갈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가장 두려운 여자, 두 번 다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여자, 자신을 가혹하게 학대했던 여자인 사라에게로 돌아갔다. 축 처진 어깨가 아니라 당당한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이제 하갈에게는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사라의 집에서 그녀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한미라, ‘여자가 성서를 읽을 때’,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2년
박종수,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본 하갈 이야기’, 구약논단 16집 7-33, 2004년
김호경, ‘인간, 목적인가? 수단인가? - 하갈’, 기독교사상 48(11) 82-89, 2004년
하성애, ‘새로 읽는 하갈 이야기’ 한국 여성신학 (48), 7-23, 2002년
조남해, '하갈에게서 본 탈북여성들의 희망', 기독교와 통일 8권 2호 33-63, 2017년
Carolyn Custis James, ‘잃어버린 여인들’(Lost Women of the Bible), 마영례 옮김, 서울 :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