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창 16:15)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벅찬 감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하갈은 달라졌다. 여주인 사라의 학대와 핍박이 있겠지만, 하갈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태도가 달라지고 삶의 모습이 달라졌다. 어딘가 모르게 품위가 있었다. 세상에서 그녀의 신분은 노예였지만, 하나님 앞에선 사랑받는 귀한 딸이었다.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아브라함도 하갈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하갈이 아들을 낳자, 아브라함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이스마엘이라 이름을 지었다. 도망쳤던 여종의 의견을 따라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과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인격적으로 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하갈의 말을 듣고 자식의 이름을 그녀의 뜻을 따라 지었다. 이는 하갈이 전과 달리 변화된 삶을 살았으며, 아브라함도 하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조남해, 57~58).
창 16장에서 하갈은 분명하게 ‘사라의 여종’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사라에게 속해있지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하갈은 사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으로 바뀐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아브라함) 여종’으로 하갈을 지칭하였기 때문이다(창 21:12). 하갈이 사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여종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로서 아브라함의 부인이라는 위치를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김호경, 86).
그렇게 14년이 지났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부인으로서 자기 위치를 견고히 하고 있었다. 좋은 일 뒤에는 항상 안 좋은 일이 따른다고,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불행과 갈등은 다시 시작하였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사라가 아들을 낳자 다시 질투가 시작되었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창 21:9, 개역개정).
여기 중요한 단어는 “사라가 본즉”이다. 실제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라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라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싶어 했다.
정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을까(개역한글)? ‘놀리다’ 혹은 ‘희롱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짜하크)는 단순히 ‘놀다’는 의미인지 “누구에게 못되게 군다’는 의미인지 결정지을 수 없다(von Rad, 255). 개역과 표준 새번역은 부정적 의미로 이해하여 ‘희롱하다’와 ‘놀리다’로 번역하였지만, 공동번역은 ‘함께 놀다’로 번역하였다. 영어 성경도 KJV, NIV, NASB는 ‘놀리다’(mocking)로 번역하였고, RSV는 “함께 놀다”(playing with)로 번역하였다.
문제는 이스마엘의 행동이 아니라 자기 아들과 하갈의 아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라의 생각이다. 사라는 이스마엘과 상속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이스마엘을 쫓아낼 명분이 필요하였고, 그 때문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가서 말한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 사라는 하갈의 이름 대신 ‘이 여종’이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은 난감하였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창 21:11). 14년 전에는 일 초의 근심도 없이 하갈을 사라에게 넘겨주었던 아브라함이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뿐이었다. 하갈은 추방되었다. 처음엔 자진하여 도망했지만, 이제는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고대 사회는 공동체 사회로서 모집단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제일 큰 형벌이 추방이었다. 하갈은 어깨에 메고 갈 만큼의 양식과 물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야박해도 너무 야박하다. 14년 동안 아들 낳고 살았으면, 최소한 낙타 한 마리에 양식과 물을 실어 주고, 종까지 딸려 주어야 하지 않는 건가? 아브라함 집에 종이 얼마나 많은데. 사라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조금도 마음을 써 줄 수 없었다.
하갈은 방황하였다(창 21:14). 길을 몰라서 방황했다기보다 마음에 받은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다 잃어버렸다. 물이 떨어지자 아들을 떨기나무 아래 두고 화살 한바탕 거리에 가서 방성 대곡하였다. ‘화살 한 바탕 거리’는 단순히 화살을 쏘아 올려 그 화살이 떨어지는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어미의 눈물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겨 있고, 어린 자녀의 생명을 지켜낼 수 없다는 절망에 주저앉아버린 지점을 뜻한다.
엄마의 마음과 눈물이 전달되었는지 어린 아들 이스마엘도 울기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말씀하셨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7,18).
하갈은 다시금 자신을 감찰하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사라와 아브라함 집에선 추방당했지만,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사라나 아브라함의 호의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은혜)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장성하기까지 함께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창 21:20).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역할을 하셨다. 많은 사람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읽는다.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존재로 이해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모르는 태도요 생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된 백성 곧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버림받고 외면당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 알 수 있다. 편협된 국수주의, 자기 민족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유대민족은 다른 민족을 개같이 여겼지만, 하나님은 세상(모든 민족)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부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거나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죄 가운데 살면서 사람에게 손가락질받고 외면당하고 버린 바 된 사람들에게도 임한다. (다음에는 사라의 관점으로 하갈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성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
조남해, '하갈에게서 본 탈북여성들의 희망', 기독교와 통일 8권 2호 33-63, 2017년
김호경, ‘인간, 목적인가? 수단인가? - 하갈’, 기독교사상 48(11) 82-89, 2004년
G. von Rad, ‘국제성서주석 창세기’안병무 옮김,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8년, 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