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창 16:2)
아브라함은 사라를 사랑하였을까?
이삭과 야곱은 아내를 사랑하였다.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창 24:67)고 기록하였다. 야곱은 라헬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칠 년을 며칠같이 지냈다(창 29:18,20,30)”고 한다. 반면 아브라함은 사라를 사랑했다는 표현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왜 성경은 아브라함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아브라함은 아내가 먼저였을까? 자식이 먼저였을까?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내는 가문의 대를 끊지 않고 이어주어야 한다. 오죽하면 형이 대를 잊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아들을 낳아주어 형의 가문을 유지하여 주는 수혼 제도(levirate law)가 있었을까. 당시 사회에서’ 자식을 못 낳는 여인”은 여자에게 가장 큰 저주였다.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아브라함의 부족은 멸문 위기를 맞게 된다. 족장 아브라함에게 출산은 지상 최대 과제였다.
사라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씨’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창 12:2, 13:16, 15:5). 그러나 사라는 아이를 출산할 수 없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외하였음을 느꼈다.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에 사라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다”(창 16:2)고 해석하였다.
상황이 이러하자 아브라함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녀를 얻으려고 하였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자녀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암묵적으로, 때론 모략으로 자녀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는 종 엘리에셀을 아들로 삼으려고 하였다(창 15:2). 그는 자기 부인을 누이라 속이므로 애굽의 바로 왕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콜롬비아 대학의 나오미(Naomi Steinberg) 교수는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제거하고 새로운 아내를 얻기 위한 모략으로 해석하였다(정일승, 50). 아브라함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아내를 내주었다는 사실에서 아브라함의 의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애굽 왕이나 그랄 왕에게 사라를 보낼 때 그녀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 사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 쓸모없는 여자로서 그녀의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가? 사라는 남편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왕대일 교수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부부 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창 18:11절 말씀(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늙은이였다. 사라에게는 다른 여인들과 같은 달거리가 끊겼다)을 근거로 지적한다. 왕대일 교수는 BHS(슈투트가르텐시아판 히브리어 성서)의 제안에 따라 단수가 아닌 복수로 해석하였다. 여기 ‘달거리’는 문자적으로 '생리’를 뜻하지만, 히브리어 특유의 말장난을 따르면 그것은 ‘(여인들의) 부부관계’를 뜻한다. 실제로 사라는 되뇐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2). 그녀가 말하는 즐거움은 부부관계를 뜻한다(왕대일, 64).
이런 전후 사정을 헤아리면 사라가 느끼는 위기가 얼마나 컸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하갈을 미워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사회에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여주인의 아이로 인정되었다. 여주인이 여종을 시기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곱의 부인인 라헬과 레아의 경우가 그 점을 보여준다.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여종 빌하를 통하여 대신 아기를 얻었을 때, 그녀는 마치 자기 일인 양 크게 기뻐하였다. 그 점은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라는 왜 하갈의 출생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미워하고 학대하였을까?
그것은 사라가 자신의 위치와 남편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갈이 아이를 낳은 후 아브라함이 하갈을 사랑하였음을 여러 가지 간접 증거들이 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 하갈을 내쫓으려 했을 때 아브라함이 크게 근심하였다(창 21:11). 겉으로 볼 때는 매정하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창 25장 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 이삭과 이스마엘은 함께 아버지 장례를 치른다. 이로 보건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고 가족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미드라쉬 라바’라는 유대 랍비 문헌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가 죽은 후, 재혼한 여인 ‘그두라’(창 25:1)는 사실 ‘하갈’이었다고 한다(이환진, 71).
이러한 배경에서 사라의 처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녀는 절대적 위기 가운데 처한 여인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눈물, 그녀의 아픔, 그녀의 서러움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라를 찾아오시고 그녀에게 ‘씨’를 주신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씨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에게 해당한다.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 사라가 낳은 자식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스마엘을 비롯하여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등 여러 명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씨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사라가 낳은 이삭만 ‘씨’라고 하였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점을 지적하였다(롬 9:7-9).
사라와 하갈 이야기는 고대 사회에서 고통받는 여인 이야기다. 하갈 이야기만 읽으면, 사라는 가해자이고 하갈은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 이야기를 읽으면, 사라 역시 피해자로서 엄청난 위기 가운데 눈물로 지새웠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잊혀졌고, 남편에게 잊혀진 존재로서 위협감을 느꼈다.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소망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그러하지 않은가? 나는 하갈에게도 마음이 가지만 사라에게 더 큰 마음이 있다.
성경을 선과 악의 구도로만 읽어선 안 된다. 다양한 각도로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뜻의 풍성함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약자와 변두리인, 소외당하는 사람, 조연과 엑스트라를 살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정일승, ‘하갈은 과연 약자 혹은 희생양인가?’, 구약 논단 제17권 1호 (통권 39집), 33-58, 2011년
왕대일, ‘사라의 웃음과 하갈의 울음’, 세계의 신학 (13), 50-78, 1991년
이환진, ‘이집트 여종 하갈의 엘로이’, 세계의 신학 (27) 66-88, 19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