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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07. 2020

다산 정약용의 마음 다스리는 법

다산 정약용의 나이 40. 왕의 비서실장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정약용이 속한 남인은 숙청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천주교라는 누명을 쓰고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된 뒤에는 서용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용보가 경기관찰사로 있을 때, 정약용은 암행어사였습니다.

정약용은 서용보의 비리를 발견하고 조정에 고발하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서용보는 정약용에 원한을 품었습니다.

모든 대신이 정약용은 죄가 없으므로 풀어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당시 우의정이었던 서용보는 끝까지 반대하였습니다.

서용보는 다산을 강진으로 유배 보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간신배 이안묵을 강진현감으로 승진 발령하였습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다산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이안묵은 정약용이 죄를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왕을 원망한다고 거짓으로 고발했습니다.

다산은 끌려가 심문을 받았지만,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풀려날 희망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역죄인이라고 그를 멀리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대나무 가지처럼 바싹 말라버렸습니다.


마음 속에는 억울함,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 서러움, 분노, 복수심 등 온갖 나쁜 마음이 들끓었습니다.

고향 생각과 처자식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은 완전히 박살났습니다.

이안묵은 그러한 다산을 보고 가만 내버려 두어도 곧 죽을 것 같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다산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원망뿐이었습니다.

자신을 유배 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용보를 저주하고 복수를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 멀리 한양 땅 벼슬아치를 저주한다고 해서 얻을 유익은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몸과 마음만 병들 뿐이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다산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습니다.

그는 아들 정학유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나는 천지간에 외로이 서서 오직 글쓰기에 내 목숨을 의지하며 살아 있을 따름이다. 혹 마음에 드는 글을 한 구절이나 한 편이라도 지으면 홀로 읊조리고 음미하다가 이 세상에서 오직 너희에게만 보여 줄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정약용 산문선집 다산의 마음, 박혜숙 편역, 돌베개, 185)


그는 글쓰기로 마음을 치료하면서 자녀에게도 독서와 글쓰기를 강조했습니다.

“청족은 비록 독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존경을 받지만, 폐족인데도 식견이 모자라면 더욱 가증스럽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이 비루하게 여기는 것도 슬퍼할 만한데, 지금 너희는 또 자신을 천하게 여기고 자신을 비루하게 여기니, 이는 스스로 만든 일이라 슬퍼할 만하다.”(위의 책, 186)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 곁을 가까이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산은 절망적인 환경에서 불평하는 대신 공부하며 글 쓰는 데 집중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그런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진현감이었던 이안묵도 떠나자 사람들은 정약용을 조선 최고의 학자라고 인정했습니다.

강진의 아전 중 자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산에게 자녀를 맡겼습니다.

머리 좋고 가문 좋은 사람은 모두 한양으로 공부를 떠났고, 강진에 남은 자녀는 평범하다 못해 수준 미달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아이들이었지만 다산은 실망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여 가르쳤습니다.

다산은 여섯 단계로 교육했습니다.

첫째 단계별 교육이었습니다.

다산은 천자문이 아동 발달과정 중 인지 과정을 무시한 점을 깨닫고 직접 교본을 만들었습니다.

공부는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계를 따라 체계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둘째 전공별 교육으로 제자들의 개성과 역량과 취미가 어디 있는지 살펴서 문학과 이학으로 나누어 가르쳤습니다.

셋째 맞춤형 교육으로 아이들 하나하나 개별지도를 하였습니다.

개인의 처지와 성품을 가늠하여 힘써야 할 부분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넷째 실전형 교육으로 자신이 평소 책을 읽으면서 사용하는 방법인 초서법(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골라 적고 그 밑에 자기 생각을 적는 방법)을 훈련했습니다.

다섯째 토론형 교육으로 다산이 속한 남인 학당이 실천하던 교육법입니다.

질의 응답과 토론을 통해서 심화 학습을 했습니다.

여섯째 집체형 교육으로 팀을 이루어 한 가지 과제를 공동으로 풀어가는 방법이었습니다.


다산은 강진학당을 그렇게 운영했습니다.

별볼일 없는 아이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유배생활 19년 동안, 다산이 500권의 책을 쓴 것은 바로 강진학당 학생들과 공동작업을 한 덕분입니다.

다산은 작업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제자들과 함께 자료를 수집 검색하고, 초서와 정서를 하고, 수정과 교정과 대조 작업을 하였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정서하고, 역량이 부족하면 카드 정리나 제본 같은 단순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빠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동학습과 연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나의 저술이 완성되기까지 다산은 다섯 차례 이상 검토하면서 수정하며 지도하였습니다. (정민, 다산의 재발견, Humanist, 57-91쪽 요약)


다산의 책은 학문적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글은 하나같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한양에서 벼슬할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백성의 아픔과 눈물을 본 것입니다.

500권 중 한 권인 목민심서에서 다산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목민관(조선의 지방관리)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있는가?”

그는 하늘이 백성 모두가 다 함께 살아가게 하려고 군주와 목민관을 세웠다고 밝힙니다.

그는 ‘맹자’를 주해한 ‘맹자요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소망하는 바가 있다. 온 나라가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차별적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사회적 평등을 확립하기 원했습니다. (금장태, 다산 정약용, 살림, 129-130쪽)


다산은 행복했습니다.

비록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지만, 그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하여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 이공택이 사헌부 감찰에서 파직당하였을 때 파직을 축하한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는가? 장사를 하겠는가? 그간 못한 공부를 제대로 해보게. 하늘이 내린 기회일세. 독서를 하고 후학을 길러 그 보람이 만세에 빛나고 그 은택이 세상을 환히 비추게 해주게나.”


친구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의 마음이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삶의 의미를 찾았으며, 행복하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양육하면서 함께 공부하는 기쁨을 맛 보았습니다.

그의 글은 단순한 지식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였습니다.

2012년 유네스코는 세계 문화 인물로 다산 정약용을 선정하였습니다.


https://youtu.be/QyOznHbyG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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