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도 바울하면 굉장히 경건하고 능력이 많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쓰임받는 사도가 된 것은 모두가 다 우리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함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건방진 느낌이 듭니다.
심지어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본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그 의미가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5절)
그리고 16절을 말하는 데 한글 성경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6절에 나온 ‘먼저’라는 말 때문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NIV 영어성경은 보다 정확히 번역했는데 ‘먼저’라는 말은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로 대치되야 그 의미가 정확히 통합니다.
제가 바꾸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중의 괴수인 내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의미가 훨씬 잘 통하지요?
세상에 죄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바울은 그 중에서도 자기가 제일 가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처럼 더러운 영혼이 깨끗함을 받은 경우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점을 거듭 거듭 반복하여 말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3:8)
바울은 정말 자신이 죄인중에 괴수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바울은 겉보기에는 굉장히 훌륭하고 멋진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동시에 로마인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영어에 아주 능통한 글로벌한 교양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하였고, 자신이 율법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라면서 자신이 정말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으로 무장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출신 배경을 이야기할 때 보면 그걸 잘 알수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
아마도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던 때에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스데반 집사를 죽일때에 그는 앞장서서 그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보면서 아주 통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는데 그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시원하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부족하여 예수믿는 사람들의 남은 무리를 다 없애버릴 계획을 가지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을 잡아올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할수만 있으면 예수 믿는 자들은 다 잡아서 돌로 쳐 죽이고 싶었습니다.
자 이러한 바울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용서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있는 죄와 용서하실 수 없는 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죄는 절대로 용서가 안된다.
그런 죄를 저지른 자는 무조건 지옥 불이다.
그렇게 규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죄의 등급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죄의 등급을 나눕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르지 않는 죄는 모두 중한 죄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죄를 범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떠들어 되는 몇몇 죄의 목록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죄가 우리가 매일같이 저지르는 거짓말, 위선, 가식, 교만, 가장된 겸손보다 더 큰 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는 다 큰 죄이고 지옥 갈 죄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인간의 눈으로 죄를 보는 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죄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경중, 무게가 있을까요?
죄는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큰 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은 구제 불능이고 반드시 지옥갈거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재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크고 중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바다보다 더 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하늘보다 더 높을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본문의 바울이 바로 이점을 강변합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셨고, 오히려 나를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
나는 모든 죄인에게 본이 되는 사람이다.
나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은 있으면 나와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본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회심하고 돌아설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타고난 성격을 보아도 그렇고, 그가 어렸을때부터 받아온 바리새 교육도 그러하고, 그는 정말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정말 사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고집덩어리였습니다.
그는 완악하고 완고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두손 두발 다 들었기에,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만 깨닫는 그런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실지로 그가 변화되어 제일 먼저 찾아간 다메섹 교회의 아나니아도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도 늑대가 변하여 양이 될수 있을진 몰라도, 사울이 변하여 예수 믿을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멈추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랑하셔서 바울을 구원하신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것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최종 종착점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으니 됐어”합니다.
되긴 뭐가 되었습니까? 아무것도 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뭐가 잘나서 나를 구원하고 하나님께서 아휴 이제 되었다.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여러분 우리는 사도 바울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우리 역시도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버러지만도 못하다고 했고,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생을 구원하신 이유가 그저 한 명 구원했다로 끝내시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본이 되게 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구원의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에베소서에서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여기 선하다는 말은 착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선과 악을 말할 때 그 기준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해야 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 선한 행동, 선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악한 자들도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저는 오늘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실과 말을 가만 생각해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함을 드러내는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
과연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정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로구나 느낄까?
교회가 다시 살고, 그리스도인이 다시 살고, 복음의 영향력이 다시 회복되려면, 바로 여기서부터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 교회는 다시 부흥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서 바울처럼 본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NEg_kaGIFs&t=3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