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경 읽기의 위험성 두가지와 그러면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성경 읽기의 두가지 위험성은 첫번째는 평신도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고요. 두번째는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한국 기독교를 좀 과장하여 표현하면 성경 중심의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마다 성경 읽기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않는 교회가 없다 할 정도입니다.
큐티도 열심히 하고, 일주일 만에 성경 한 권을 독파하는 통독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이렇게 열심히 읽는데 왜 한국 기독교는 매일같이 욕을 먹고 있을까요?
레슬리 뉴비긴은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고, 그 말씀을 사랑하여 날마다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을 읽지 않다니요?
레슬리 뉴비긴이 한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레슬리 뉴비긴의 말을 곰곰이 새김질하면서 우리의 성경 읽기 방법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적용하려고 읽는 잘못입니다. 이는 평신도들이 주로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한국 교회는 성경 말씀의 적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 읽기를 가르칠 때마다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적용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읽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매우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저는 적용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큰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적용하려면 말씀을 자기 상황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말씀을 자기 상황으로 바로 연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말씀을 삶으로 연결하려는 경향은 곧 적용하기 좋은 말씀에 자꾸만 눈이 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강조하여 읽는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편식이지요.
제가 적용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말씀의 뜻입니다.
말씀의 뜻과 상관없이 문자만 가져와서 내 삶에 적용하려는 것은 오독입니다.
문맹과 문해력은 다릅니다.
문맹은 글을 읽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말합니다.
한국인의 문맹률은 1%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전국민이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을 읽을 줄 아는데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013년 OECD 회원국의 노동 인력의 질을 평가하기 위해 실질 문맹률(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조사했습니다.
충격적이게도 한국은 OECD 국가 중 꼴찌를 했습니다.
꼴찌를 했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그 비율은 더 충격적입니다.
한국의 실질 문맹률은 77.4%였습니다.
그러니까 국민 4명 중 3명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낮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전해 들은 또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파사데나 풀러 신학대학원에 공부하러 온 목사의 사모들이 하는 큐티 모임 이야기입니다.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목사의 사모이니 그들의 성경 읽기와 적용 능력은 한국 평균 그리스도인보다는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한 한 사모가 도저히 함께 성경을 읽고 큐티할 수 없다고 탈퇴를 하고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병이어 본문을 읽고 적용하면서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야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똥입니까? 방구입니까?
전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진담이었고 모든 사모가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현재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용만을 강조하여 읽는 방식의 가장 큰 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에 담긴 뜻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적용하다가 나온 폐단입니다.
적용은 가장 나중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신학의 틀을 가지고 읽으려는 잘못입니다.
이것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교리와 신조를 많이 가르칩니다.
교리와 신조는 중요합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모든 교파는 각기 나름의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교리와 신조는 교파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강조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얽매이면 성경의 풍성함을 읽어내지 못하고 편협되게 읽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우리는 다른 교파나 다른 신학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장로교(제가 장로교여서 장로교를 예로 듭니다)에만 갇힌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폭이 넓다고 하지만 사랑만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폭도 넓습니다.
세상의 모든 교파가 깨달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 모아도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총신대에 입학하면서 제일 먼저 정성구 교수에게 칼빈주의를 배웠습니다.
총신에서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총신은 칼빈주의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총신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입학하던 78년부터 졸업하던 88년까지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습니다.
칼빈주의는 총신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WCC를 지지하는 장신도, 급진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한신도 칼빈주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칼빈주의를 다르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칼빈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도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교파마다, 학자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라는 큰 울타리가 있어서 너무 벗어나면 이단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 큰 울타리 안에서는 서로가 다양한 시각으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를 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교리와 신조만 옳고 정답이라 고집하며 읽으면 안 됩니다.
마틴루터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않으면 바로 읽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꼭 구속사적으로만 읽어야 합니까?
다른 방법으로 읽으면 안됩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언약을 주제로,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하나님의 통치, 사랑, 정의, 안식, 노동, 거룩 성경의 다양한 주제들이 철철 넘쳐나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주제로만 읽어야 합니까?
그것 아니면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이 아닙니까?
신학을 강조하다 보면 나의 신학만이 마치 정답인 것처럼 주장하는 독선을 부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학은 공부한 이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면 이단이구나 하는 것을 알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담고 있는 성경 안에서 마음껏 헤엄을 쳐야 합니다.
다양한 각도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살펴보면 앞서 간 위대한 신앙인들이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을 읽었구나 알게 됩니다.
3. 성경 읽기는 자기를 깨트리기 위함이다.
성경 읽기를 통해서 나의 편견, 나의 생각, 나의 관점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회심 - 자기를 깨트리는 것,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하여 읽는 것이 아닙니다.
깨트린다는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생각의 폭을 넓히고, 관점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 토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을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글을 읽었다고 읽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해하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연구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장 늦게 쓰인 요한계시록도 2,000년 전에 쓰였습니다.
그때 시대적 상황과 배경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원독자(처음 성경을 읽던 독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읽었는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다양한 자료를 참고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다양한 번역본들을 참고하고, 성경 사전도 참고해서 읽어야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검색해보면 다양한 자료들이 나와 있습니다.
물론 좋은 자료를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검색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하나를 알았다고 해서 다 알았다고 전제하지 말고, 끊임없이 나의 사고와 생각의 틀을 넓히려는 자세, 즉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두번째로 성경 읽기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경험치가 다릅니다.
경험만 다른 것이 아니라 이해의 수준이 다르고, 이해의 폭이 다릅니다.
많이 배웠다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적게 배웠다고 반드시 무식한 것도 아닙니다.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다양한 각도로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수준으로 읽고 이해한 것을 토론하다 보면 나의 생각이 좁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공부하는 목사 모임을 만들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책을 읽고 토론하였습니다.
토론은 격렬하여서 치열한 논쟁을 합니다.
때론 합의를 보지 못하고, 끝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런 격렬한 논쟁과 토론을 통해서 내가 깨어지는구나.
성경 읽기는 남을 깨트리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성경 읽기는 남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설득하기 위함입니다.
공동체의 성경읽기는 바로 그런 장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약하고 부족하지만 모두가 합쳐지면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 읽기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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