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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28. 2020

탈 교회화 시대 교회의 죽음과 부활

오늘은 월터 부르그만의 탈교회와 시대의 교회에서 바벨론 포로기 상황을 설명한 부분을 제가 이해하고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 곧 교회의 죽음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죽음을 살펴보고, 어떻게 다시 교회의 부활 혹은 새생명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왕이라는 권력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 공생관계는 무너졌습니다.

성전은 무너졌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성전이 없어졌으니 제사장의 역할도 없어졌고, 여호와 종교는 끝났습니다.

모두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2,000년 동안 유지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출생이 있고, 성장이 있고, 노화와 병드는 것이 있고 소멸하기도 합니다.

물론 로마의 바티칸처럼 권력과 짝하여 형태상의 조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존속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생명체라기보다는 정치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교회는 병들과 죽기 마련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교회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어가는 교회가 나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사데 교회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산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기 직전, 아니 죽은 교회입니다.

병들어도 너무 병들었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장은 다 쫓겨나고 없어져 버린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성전 종교의 실상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왜 죽었는지, 사인을 조사하기 위하여 부검합니다.

저는 월터 부르그만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의 여호와 종교를 부검해보고, 어떻게 다시 여호와 신앙이 살아났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불신 사회에서 발언권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회의 공공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력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냥 무력한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 최강의 바벨론 문화에 흠뻑 젖어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바벨론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라는 세계 최강대국의 영향 아래 살게 됩니다.

그들은 언어를 잃어버리고, 문화적으로 세상에 동화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만, 사실 돌아간 사람보다 에스더처럼 남은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들은 세속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완전히 빠져있었습니다.

영향을 끼치기보다 오히려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사망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월터 부르그만의 분석은 이러합니다.

사회 정치적으로 완전히 주변부로 밀려난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영화로운 기억이 아닙니다.

우리도 한때 다윗과 솔로몬을 모시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때가 있었지, 언젠가 그런 때가 올 거야 하고 그때를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기억은 더욱더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그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광야를 걸어가던 그때를 떠올렸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 시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던 그 시절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던 그 시절을 떠올립니다.

밑바닥 인생, 주변부 인생이 더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곳이 없는 광야의 기억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가져옵니다.


그 희망은 철저한 반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절망 속에서 희망이 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역사를 기록할 때는 승자의 역사,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하면서 밑바닥을 경험한 그들은 패자의 역사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잘못, 솔로몬의 잘못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로 이어지는 슬픈 패자의 역사요 절망의 역사입니다.

정말 철저한 반성과 회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영광스러운 장면도 있지만 정말 수치스러운 장면도 있습니다.

일본 침략기에 민족의 아픔을 안고 만세를 외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 시절 이미 메가쳐치가 등장하고, 현재의 부정과 부패한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썩은 고름이 이미 초기부터 있었고, 일본 권력에 아부하던 모습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 교회는 권력과 짝하여 부패에 부패를 더하여 갔지만, 참된 반성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벨론 포로기 반성의 역사, 참회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두번째로 그들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회당이라는 교육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들의 종교는 예배(제사)중심의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고, 그냥 제사만 드리면 다 되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렸고, 그것을 복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머리는 텅 비었고, 가슴은 욕심으로 가득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한국 교회에 돌아다니는 말 중에 교인은 목사의 실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

목사가 무식하면 교인도 무식합니다.

목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어도 무조건 아멘 하면서 복 받기를 소망했습니다.

무식한 교인을 만들면 목회하기 참 편합니다.

이스라엘은 끝장난 이후, 제사장과 레위지파가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성경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종교 지도자들의 헛된 소리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각성입니다.

그들은 성인 20명만 모이면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한국의 메가 쳐치들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면서 복 받기를 소망하고, 그런 교회를 다니는 것을 무슨 계급장처럼 여기는 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20명씩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목사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목사가 허튼소리를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코로나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새로운 성경 교사들이 곳곳에서 등장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교회에 충성하던 교인들은 이제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소리를 해야 합니다.


포로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본문 공동체로 발전하였습니다.

포로기 이스라엘은 구약 성경의 표준 작업 즉 정경을 제작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허망한 소리, 신비주의, 가짜 성경(위경 ), 외경은 다 솎아내고 참되고 바른 하나님의 말씀만 모아서 정경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텍스트를 확정하고 그것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성전이 없어져도, 종교 지도자가 없어도, 성경이 있으면 여호와 종교는 살아납니다.


월터 부르그만은 말합니다.

“텍스트가 없는 교회는 결코 교회가 아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가짜 뉴스를 버려야 합니다.

복 받겠다는 일념으로 말도 안 되는 신비주의에 속는 일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권의 대변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죽고 다시 부활하려면,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삶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작은 회당 공동체들이 서로 연결하여 망을 구축하므로 여호와 신앙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작은 교회들의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각개전투하면서, 나 혼자 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몸입니다.

맹목적으로 하나로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헌신했던 레슬리 뉴비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용적인 이유로 서로 연합하려는 생각은 크게 비판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육신의 사명을 세상에서 감당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기관입니다.

교회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곧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는 그 구원의 표지요 도구입니다.


이제 우리는 혼자만 살려는 태도는 버리고 연대하여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다시 부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PLIXDmWdT4&t=5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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