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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29. 2020

펜데믹 포비아 이렇게 이겨내자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모세가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위하여 30일 동안 애곡하였습니다. 

애도 기간이 좀 길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칠일 간 애곡하였습니다. 

당시 애굽의 총리이니까 아버지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애도 기간을 칠일 간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까지 다가와 모압 산지에 있습니다. 

모압 땅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높아서(대략 1,000미터 고도차이) 그곳에서는 가나안 땅이 훤히 다 보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모압 산지에 백성이 흩어져서 가나안 땅을 쳐다보며 30일 동안 울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울었을까요?

모세가 죽은 것이 너무 슬퍼서 울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특별히 자기들이 부모처럼 여기는 사람이 죽으면 억장이 무너지지요. 

그런데 저는 슬픔을 뛰어넘어 그들 마음 속에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 왕에서 당당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냈습니다. 

그는 광야의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30일 동안 애곡하게 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4절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고대인들은 눈물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자녀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회당에 돌기둥을 세워놓습니다. 

어린아이를 징계할 때는 그 돌기둥을 잡게 한 뒤 뒤에서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그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울면 안됩니다. 

그 모진 매를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합니다. 

고대인들은 고통을 견디는 훈련을 했고, 그래야 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바울이 선교하다가 고통받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11:23-25)


전 군대에서 빠다를 한대 맞고선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매를 수없이 맞았습니다. 

그때마다 “아이 아파” 하면서 종아리를 잡고 폴짝폴짝 뛰었을까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만 아니라 초대교회 교인들은 고통과 고난을 견디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런면에서 디모데의 눈물은 참으로 의외입니다. 

디모데가 울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파서, 고통 때문에,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영적 지도자요, 아버지인 바울을 떠나 혼자서 목회라는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건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자기 앞에 주어진 막중한 사명과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 두려워하였습니다. 

디모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지금 펜데믹을 만나 그런 두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는 디모데나 여호수아처럼 막중한 사명은 없습니다만, 한가지 장래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과학과 철학과 경제를 주름잡으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던 세속 사회도 지금 우왕좌왕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펜데믹 앞에서 허둥지둥 추한 꼴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하루에 폐업하는 가게가 천개씩이라고 합니다. 

세계가 공포와 공황속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의 그림자에 짓눌려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바울은 바로 그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저는 먼저 두려움이 무엇인지, 불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주어진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도 생각하고 결론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두려움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입니다. 

두려움은 임박한 위협이나 위험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뱀을 두려워합니다. 

뱀을 보면 몸이 경직되고, 심장이 갈비뼈를 때립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자리에 얼음처럼 굳어집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생존에 아주 중요한, 쓸모 있는 방어 기제입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면 자신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두려움에 너무 사로잡히면, 사람은 위험 앞에서 얼음처럼 굳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일이나 환경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불안은 두려움과는 좀 다릅니다. 

불안은 사건과 환경보다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마음 속에서 공연하게 불안이 솟구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안은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위험한 일을 만나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두려워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도 오래도록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십자가 형을 받기도 하고,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뜨겁게 달군 쇠의자에 앉혀서 고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살던 사회는 불안과 염려와 공포가 만연한 사회였습니다. 

그러한 사회에 살면서 어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두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얼움처럼 굳어버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속수무책 당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좀더 조심하게 되고, 새로운 출구를 창의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두려운 일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염려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얼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과 환경과 사건 뒤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앞에 다가온 상황과 환경을 우리가 바꿀 순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예술 작품을 만드는 필 핸슨(Phil Hansen)이란 미술가가 있습니다. 

그는 TED에서 “떨리는 손을 받아들이세요”(Embrace the Shake)라는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그는 세밀화를 그리는데 주로 사용하는 점묘법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손 떨림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 때문에 점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갔는데 신경이 손상되어서 회복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괴로워하는 그에게 어느날 의사는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Embrace the Shake!” 

장애를 받아들이고 살라는 간단한 말이지만 필 핸슨은 거기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손 떨림이 있다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손 떨림이라는 신경성 장애를 가지게 되었지만, 자기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창의적인 그림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상인이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장애는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과 모자람을 받아들였지만, 그 안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조심하게 만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제하게 합니다. 

방종하지 않습니다. 

젊다고, 돈이 많다고, 건강하다고, 능력있다고, 잘났다고 제멋대로 살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그런 면에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펜데믹이란 상황에서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과학과 의학과 문명이란 게 어찌보면 참 우습고 하찮은 것입니다. 

바이러스 하나로 세계가 꼼짝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유진 오닐이란 작가가 ‘나사로가 웃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나사로가 부활한 이후 삶의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한번 죽어본 경험을 하고 나니까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 너머 영광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니까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극한 환경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니가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지금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얼음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사랑과 절제가 있습니다. 

이 두려움 속에서 몸을 움추리지만 마시고, 조심 조심 절제하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능력을 창의적으로 사용해 보십시요.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십시요. 

그러면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5blK74kjGg&t=3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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