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이 많았습니다.
그는 열정이 넘쳤습니다.
흔히 감정을 강조하면, 광신도가 될 것으로 여겨 일부러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얼굴에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감정이 억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교육받기를 교회에서는 서로 인사하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마라.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라!
결국 감정이 메마르고, 따뜻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진 바리새적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정말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모습일까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눈물과 기쁨, 바울의 감사와 희열, 베드로의 슬픔과 행복을 보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살펴보아도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쁨이었습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한 태도는 감사였습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매력 포인트였습니다.
요즘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그냥 얼굴만 보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점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끊임없이 눈치를 보는 모습은 동일합니다.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어느 그룹에 들어가야 편할지 고민하는 모습은 동일합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유력한 사람인지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동일합니다.
어떤 때는 세상보다 훨씬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교인들이 모였다 하면 서로 질투하고 싸우는 모습입니다.
말로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미워하고 편 가르고 뒤에서 험담을 늘어놓습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 행동이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와 교단과 교파는 서로 갈라져 자기가 잘났다, 정통이라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싸웁니다.
자신들은 옳고 정직하다고 생각하면서 온통 ‘하지 말아라’’잘못이다’를 떠들어 대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자신들이 가장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필립 얀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 남부 출신입니다.
미국 남부를 고상하게 말하면, 바이블 벨트라고 하여서 기독교적 신앙을 공기처럼 호흡하며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답답하기 그지없는 근본주의 풍토하에서 꽉 막힌 보수주의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답답한 곳에서 자란 그가 대학을 마치고 미국의 북부 자유로운 곳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 전에 가지고 있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신앙이, 사실은 예수님이 그토록 싸웠던 바리새주의였고, 바울을 그토록 못살게 굴었던 율법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남부 기독교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영화란 애당초 눈길을 두어서도 안 되고, 볼링장에는 얼씬해도 안되며, 롤러스케이트를 타도 안 되고, 다 자란 남녀가 손을 잡기만 해도 호통을 치는 온통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교인들은 세상의 사악한 세력들에게서 자기 자녀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이런 금지령을 당연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모순적이게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가장 심하게 하였습니다.
얀시는 오래지 않아서 자신이 뭔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교회는 도대체 무엇이며, 하나님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신앙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미국 남부의 크리스챤들)은 은혜를 말했지만, 율법으로 살았다.
사랑을 외쳤지만, 증오를 달고 다녔다.
남부의 근본주의의 영토에서 나올 때, 불행히도 나는 위선의 껍질뿐 아니라 신앙이라는 몸통까지도 내던졌다.“
그런 그가 돌아왔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남들을 사정없이 정죄하고, 야단치고, 몰아붙이는 사람들 쪽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 때문에 상처받고, 교인들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 영적으로 침체하고 기력과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 입장에서 기독교를 재해석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다시 설명하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의 책 제목들이 하나같이 좀 도전적입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상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아! 하나님 이럴수가 있습니까?”
정통 보수주의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모습은 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라는 형식과 틀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소위 정통 교리에 대한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지식, 앎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합니다.
교회마다 목사마다 바른 정통 진리를 가르치고자 노력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교리가 가장 정통이고 바르기 때문에 자기 이외는 모두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자기와 다르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정죄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바리새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마른 고구마 백 개나 먹은 듯 가슴이 턱 막히곤 합니다.
그에 대한 처방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오늘은 감정이란 측면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은 노골적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일반적으로 감정적이고 즉각적이고 표피적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 즐겁고 행복하고 만족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담배를 피거나, 약물에 의존하거나,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펜데믹같이 답답한 상황을 만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능력을 찾지 못하고 불안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여기 그리스도인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심취한 종교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손과 발에 착고를 차고 갇혔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찌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곳에서 기뻐했습니다.
매를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심한 통증이 있는데 그는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건 환경 때문이 아니고, 그의 성품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그가 믿고 있는 주님 때문입니다.
그는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리새 종교에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저 단순한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돈과 명예와 권세와 쾌락을 추구하는 데 바울은 그들보다는 한 단계 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헌신의 목표를 잘못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헌신의 방향을 새롭게 수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어떤 환난과 고난이 다가와도 그의 헌신의 목표와 방향은 바꾸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에게 롤 모델이 되신 분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다 내주시며 죽으신 주님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달게 받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면 자신은 기꺼이 희생하였습니다.
누군가 자신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그는 한없이 기뻐하였습니다.
누군가 복음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된다면, 그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복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희생의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계시나요?
세상 사람처럼 돈과 명예와 권세와 쾌락을 위해 희생하시나요?
물론 거기에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나”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분도 있습니다.
내가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혹은 “나”의 범위를 조금 넓혀 나의 가족, 나의 교회, 나의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디에 헌신하든 그 나름의 보람과 만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언합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희생의 방향과 목표는 허무하고 허탄합니다.
그건 잠시 잠깐의 만족일 뿐입니다.
참된 만족과 감사와 기쁨과 행복과 보람은 주님을 롤 모델 삼아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참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길을 담대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함께 걷자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자. 서로 위로하자, 서로 격려하자. 참되게, 진심으로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참으로 전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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