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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24. 2020

모세의 아내 십보라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요, 하나님과 맞대면하여 십계명을 받은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랄 만큼 그의 부인 십보라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십보라가 딱 세 번(출2:21, 4:25-26, 18:2) 나옵니다.


이 세번의 구절도 사실 해석하기 참 어려운 본문입니다.

성경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모호하게 썼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두 번째 본문 4장에서 십보라가 자기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주는 장면이 바로 그러합니다.

개역성경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개역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했다고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여호와께서 …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는 모세일 수도 있고, 게르솜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할례를 행할 때 개역성경은 게르솜을 지칭하여 “그의 아들”이라고 함으로서 모세의 아들인 것처럼 번역하였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명백히 “그녀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NIV 성경도 히브리어 성경을 따라 “그녀의 아들”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게르솜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최소한 2,30세는 되지 않았을까요?

모세가 광야로 피신 와서 십보라와 결혼하였고, 그때 모세 나이 40세이니 빨리 아들을 낳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늦게 낳아도 10년 안에 낳았다고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애굽으로 떠날 때는 80세였으니 게르솜의 나이는 최소한 30세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가 할례를 행했다!

어머니가 어른이 된 아들의 성기를 잡아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의문점을 가진 성경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단지 독일의 구약학자 궁켈(Hermann Gunkel, 1862-1932) 정도가 성인 할례에 대해서 언급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성인 할례를 시행해서 “그의 발에 갖다 대며”했는데 여기 “그”도 모세인지, 게르솜인지, 하나님의 사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등장하는 18장에 보면 모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십보라를 장인에게로 돌려보냈었는데 이드로가 딸과 손자들을 데리고 모세에게 데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분을 두고 일부 구약학자들은 모세가 십보라와 이혼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아무튼 모세와 십보라의 관계는 한 마디로 미스테리 투성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제가 하는 모세와 십보라의 이야기는 성경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둔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저의 추측을 담은 소설이라 생각하시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모세가 광야로 피신하여 만난 미디안 족속은 모계혈통으로 어머니 중심사회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를 베너 문화(benna culture)라고 하는 데 남편은 결혼과 함께 아내의 혈족이 되고, 그 처가의 가문에서 별로 권위를 누리지 못하는 문화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데릴사위가 되었습니다.

그가 아들을 낳고 게르솜 즉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탄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십보라의 갈등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다 알다시피 모세는 애굽의 궁정에서 왕자처럼 자랐고, 후일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는 리더십이 있었고, 민족적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온갖 수모를 겪었지만, 할례 의식을 지켜왔습니다.

할례는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종교적 의식입니다.

그건 비록 우리가 힘없는 노예이지만, 누가 뭐라 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당당함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할례를 지켜왔다는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보라 역시 여장부로서 양을 치면서 가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뜻하는 할례를 행하는 문제는 모세와 십보라 사이의 갈등 요소였음이 분명합니다.

십보라는 모세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자기 문화권의 풍습대로 자신이 가정의 주도권을 행사했습니다.

카일과 델리취(Keil and Delitzsch)나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모세가 십보라를 존중해서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부가 서로 뜻이 맞지 않고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면 가정이 피곤해지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모세와 십보라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출애굽기 4장에서 게르솜에게 할례를 주는 장면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자로 부름을 받고 애굽으로 나아가려는 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뭐 그게 게르솜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십보라 가정의 문제를 확실히 하지 않고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결정하신 듯합니다.


이때 십보라는 비로소 자기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고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출애굽기 4장 본문을 보면 십보라가 지금까지 가정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게르솜을 “그녀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할례를 아버지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행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결정적 순간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출4:25)외쳤습니다.

여기 피 남편이란 뜻은 ‘할례의 피로써 결속된 남편’이란 뜻으로 자신이 남편에게 속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가정의 주도권을 남편에게 주었다는 뜻입니다.


대가 무척 센 여인 십보라의 기를 꺾는 데는 모세(혹은 게르솜)의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세는 십보라와 그의 아들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일부 성경학자는 모세와 십보라가 이때 이혼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너무 지나친 해석 같아 보입니다.

일부 학자는 모세가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그 또한 맞지 않는 해석같아 보입니다.

게르솜이나 엘리에셀이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이었으며, 모세가 자기 가족만 보호하기 위하여 따로 조처를 했다는 것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오히려 십보라와의 갈등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18장에서 장인 이드로가 손자들과 십보라를 데리고 모세에게 옵니다.

모세와 십보라는 그렇게 다시 결합하게 됩니다.

그 이후 둘 사이의 관계나 다른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둘 사이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가 민수기 12장 1절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때 십보라가 살아 있었는지 혹은 죽은 후인지 알 수 없지만, 나이가 80이 넘은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얻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위대한 일은 했지만, 가정적으로 크게 행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내의 충분한 지지와 사랑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비록 나이가 많지만 구스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점은 모세의 인간적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도 인간적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미리암은 그러한 모세를 이해하지 못하여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지요.

어쩌면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과 입장을 백 퍼센트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기도 힘들었고, 가정을 이끌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맡겨진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모세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렇다고 십보라가 잘못을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어머니 중심 문화에서 자랐고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 문화에 속해 있었을 뿐입니다. 

그녀의 리더십을 생각할 때 현대에 태어났다면 크게 쓰임받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죽이시려 했는지 정확히 알았고, 과감하게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영적인 안목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는 게 불행일 뿐입니다. 

두 사람이 천국에서는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https://youtu.be/BP3o0-X8F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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