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Oct 18. 2020

요셉의 아내, 아스낫

성경 인물 중에 결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인물 중 하나가 요셉이다. 

그는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면서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여호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 감옥 생활 등을 통해서도 그는 변함없이 여호와를 의지하였다. 

그가 바로 왕 앞에서도 당당히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문제는 그토록 여호와 신앙에 투철했던 요셉이 이방신의 제사장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성경은 이러한 일에 대하여 좋다 나쁘다를 말하지 않고 그냥 사실만 담담하게 나열하였다. 

“그(바로)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창41:45)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이집트 식으로 ‘사브낫바네아’로 바꾸었다.

일본 강점기 시대에 창씨개명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뜻한다. 

그런데 요셉의 개명 사건은 - 사실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의 개명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 별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세상에서 무어라 불러도 자신의 정체성은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인가?

혹자는 사브낫 바네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란 뜻이니 괜찮지 않느냐 하겠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이 믿는 ‘신’의 일반명사이다. 

일반 명칭인 ‘신’과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언약의 신 ‘여호와’는 다르다. 

‘여호와(야웨)’라 부르면 그것은 확실한 신앙고백이 된다. 

그러나 그냥 ‘하나님’하면 통상적으로 모든 민족과 종교에서 ‘신’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조금은 겪이 떨어진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집트 사람들이 ‘사브낫바네아’ 라고 말하면 그냥 신(애굽의 신이 될 수도 있다)이 말씀하시는 사람이란 뜻이 되고

유대인이 ‘사브낫바네아’라 부르면 그건 신(여호와)이 말씀하시는 사람이란 뜻이다. 

어떤 종교 문화적 배경에서 누가 부르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유대인이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사브낫바네아’가 아니라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이방여인, 그냥 이방 여인이 아니라 이방 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딸과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요셉의 결혼은 유대인에게 풀수 없는 충격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해석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온갖 이야기가 생산되었다. 

랍비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요셉과 아스낫 이야기를 설화로 꾸며(재해석하여) 전하였다. 

특별히 이방 문화가 급속히 퍼져나가던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요셉과 아스낫의 로맨스’란 민간설화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200년 경에서 기원후 200년경까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학자들은 본다. 


‘요셉과 아스낫의 로맨스’는 요셉이 어떻게 해서 이방신의 제사장 딸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물론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이니까 시비걸 대상은 아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상, 신앙관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됨은 틀림없다. 


먼저 아스낫은 이집트 제사장 딸이 분명하지만 외모는 히브리인의 딸과 닮아 있었다고 소개한다. 

“또한 그녀는 이집트 여자들과 다르고, 어느 모로 보나 히브리 여자와 같았다. 그녀는 사라처럼 키가 크고 레베카(리브가)처럼 아름다웠으며, 라켈(라헬)처럼 우아했다.”(1:7-8)

아스낫의 외모가 유대인과 닮았다고 연결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랍비 문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아스낫은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추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하여 낳은 딸이라고 한다. 디나의 딸은 야곱의 집에 거할 수 없어서 미가엘 천사가 이집트 보디베라에게 데려다 주어 양녀로서 자랐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요셉과 아스낫의 결혼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이 보인다. 


또한 아스낫은 평생 외갓 남자를 본 적도 없는 순결한 처녀로 소개한다. 그녀는 남자가 접근할 수 없는 높은 탑 안에서 하녀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물론 그 방들은 화려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감옥생활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순결한 처녀, 외갓 남자를 모르는 처녀를 가치있게 생각하였기에 아스낫도 그렇게 묘사하였다. 


그녀가 요셉을 만나기 전에는 철저하게 애굽의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지만, 요셉을 만난 후 그녀는 상사병에 걸려 전에 우상숭배한 것을 철절히 회개하고 개종하였음을 묘사한다. 

그녀는 모든 우상을 다 치우고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보석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삼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쓴 채, 칠일 동안 금식하며 회개기도를 합니다. 그녀의 자신의 지난날 우상숭배한 죄악이 너무나 슬퍼서 금식하다가 사지가 마비되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참으로 회개한 아스낫은 마침내 요셉의 부인이 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요셉과 결혼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나았고 나중에는 형제들의 갈등까지도 화해와 조정으로 평화를 만드는 아름다운 신앙의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유대의 민간설화인 ‘요셉과 아스낫의 로맨스’는 신구약 중간기 시절 헬라 문화가 급속히 유입되면서 유대 사회가 흔들릴 때 만들어진 이야기다. 

유대인 중에는 이방여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과 아스낫의 결혼 이야기를 들어서 자신을 정당화하였을 것이다. 

민간설화는 이런 이방 결혼에 대하여 강력한 경고를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셉과 아스낫의 이방 결혼은 그냥 한 것이 아니라 아스낫의 철저한 회개와 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의 순결함을 강조하였고, 이방 여성의 회개와 개종만이 유대인과 결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민간설화인 ‘요셉과 아스낫의 로맨스’이야기와 성경의 창세기 관점은 같을까?

요셉과 아스낫 이야기는 철저히 유대 민족 중심주의, 유대 민족 우월주의 사고 방식에 기인한 것이다.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방 결혼을 배격하였던 당시 사회의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오직 유대인만이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방인은 엄격한 과정을 거쳐서 철저히 회개하고 개종해야만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창세기의 요셉과 아스낫 이야기는 아무런 비평없이 아주 담담하게 사실만 나열한다. 

여기는 이방 여인과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뉘앙스가 전혀 없다. 

창세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되는 과정이 나온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방여인들과 거침없이 결혼하였다. 

장자인 르우벤, 유다 족속의 조상인 유다도 이방여인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았고, 요셉도 역시 이집트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열린 공동체였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도 ‘수많은 잡족’이 함께 하였다.(출12:38)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그 출발부터 매우 선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방인들과 심지어 이방 노예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오는 것을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장벽을 만들기보다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유대 설화인 요셉과 아스낫의 로맨스 이야기에는 선교적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방 사람이 어떻게 하면 유대 종교에 들어올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않는다. 

죽을 듯이 금식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 밖에 쓰지 않았다. 

그런면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과 아스낫의 결혼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백성을 향한 사랑의 마음 곧 선교적인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자꾸만 전통 유대교의 폐쇄성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자신과 신앙이 조금만 달라도 정죄하고, 다른 민족,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강력한 배타성을 가지는 모습은 결코 선교적이라 할 수 없다. 

너희들이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철저히 회개하면 우리가 받아줄 수 있어! 라는 태도는 결코 선교적이 아니다. 오히려 독선적이다. 

한국 교회가 성경의 정신을 따라 열린 태도 곧 선교적 태도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PtXg_NgKeg&t=633s

매거진의 이전글 욥의 아내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