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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29. 2020

욥의 아내 이야기

성경속 여인 이야기

욥의 아내에 대해 아십니까?

혹시 욥의 아내에 관한 설교를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일반적으로 욥의 아내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네이버에서 세계 3대 악처를 검색하니 제일 첫 번째로 뜨는 글에서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 톨스토이 부인 소피아, 욥의 아내를 지목하고 있네요.

왜 악처(惡妻)라는 말은 있는데 악한 남편, 악부(惡夫)라는 말은 없을까요?

실제 현실에서 악처가 악한 남편보다 월등히 많아서일까요?

아니면 남성 위주의 사회이다 보니 악처를 자꾸만 부각하여서 그리된 일일까요?

https://youtu.be/H5cc6NvOsrs

저는 성경 속 여성을 연구하다 보니 고대나 현대 사회나 여성을 무시하고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욥의 아내 역시 잘못 평가된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이지요.

성경에 욥의 아내는 딱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이 한 마디 때문에 욥의 부인은 악처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욕할 수 있겠느냐!

이건 그 어떤 상황에 빠지더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합니다.


초대 교부 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은 ‘욥의 부인이 왜 안 죽었을까’궁금하였습니다.

미국의 코미디언 팀 호킨스(Tim Hawkins)도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는 여성을 조롱거리로 삼기 위하여 질문했습니다.

남편 처지에서 볼 때 아내가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안 죽어서 아쉬웠다는 뉘앙스였습니다.

조롱이 나쁜지, 노골적 비난이 나쁜지 비교할 수 없지만, 크리소스톰은 안 그래도 괴로운 욥을 더욱더 괴롭히려고 ‘욥의 아내가 살아남았다’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욥의 아내를 ‘사탄의 협조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말하였습니다.

욥의 소유를 다 빼앗고, 건강도 빼앗으면 욥도 사람이니까 분명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욥은 입으로 죄를 범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욥의 부인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함으로써 사탄의 의도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부인은 ‘사탄의 협조자’라고 하였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어거스틴의 말은 백 퍼센트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text)만 보았지 상황(context)은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욥의 부인과 욥이 처한 상황을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욥의 재산과 종들은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몰려와 빼앗고 죽였습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태워버렸습니다.

재앙입니다.

욥이 보유했던 재산과 사업은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욥의 자녀 10명이 맏아들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다가 모두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욥1:13-19).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이런 상황을 경험한다면, 제아무리 신앙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미쳐버리기 쉽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욥은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만 했습니다(욥2:7-8).

고통스러운 것은 욥만 아닙니다.

어쩌면 자녀를 낳아서 키우고 애정을 쏟았던 욥의 아내가 더 클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가 욥의 아내와 욥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하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너무나 참담하고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 연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기독교인이라면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에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공감 능력입니다.

문자만 보고, 교리만 생각하고, 현실과 상황과 사람의 마음은 잘 생각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C.S. 루이스는 자기 부인이 암으로 죽었을 때 하나님을 지목하여 ‘Cosmic Sadist’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책 ‘헤아려 본 슬픔’에서 그는 그 말을 5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우리 말 번역에는 그 말을 순화시켜서 ‘우주를 다스리는 가학적인 신’이라고 했지만,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우주적 변태성욕자’란 뜻입니다.1)

C.S. 루이스는 가학적인 신에 대한 생각은 사상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증오의 표현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2)

그건 정말 하나님이 Cosmic Sadist란 뜻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분노하여 표현한 감정적 언어란 뜻입니다.

그만큼 지금 미쳐버릴 것 같다는 뜻입니다.


C.S.루이스가 한 증오의 표현과 욥의 부인이 한 표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왜 C.S. 루이스는 여전히 존경받고 있는데 욥의 부인은 멸시받아야 하는가?

욥의 부인이 한 말의 뜻은 무엇일까?


민영진 교수는 헬라어 구약성경(LXX)에서 이 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던 어느 날 욥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버티고 있을 작정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리신다고요? 당신이 이런 처지에서 구원받을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당신은 아직도 가지고 계신 거예요? 여보, 날 좀 보세요. 이제 이 세상에서 당신을 기억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당신에게는 당신을 기억해 줄 자식도 하나 없어요.내가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나은 자식들, 내가 온갖 고생 다해가면서 키운 자식들, 다 없어졌어요. 당신은 바깥에서 이렇게 거름더미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고, 나는 이곳저곳,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종살이나 하고 있고, 이 지긋지긋한 고된 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보려는 생각에서 하루 종일 해지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제발 주님께 뭐라고 좀 말하고 나서 죽어버리세요.”3)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욥의 부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욥의 부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를 말하였습니다.

LXX는 초대교회 사도들이 헬라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때 주로 사용했던 성경입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도 욥의 부인이 한 말에 대하여 욥이 크게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욥은 아내를 비난하거나 큰일 날 소리를 한다고 꾸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은 아내의 심정을 이해했는지도 모릅니다.

욥은 말하였습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2:10).


욥의 부인이 한 말은 정말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이었을까요?

70인 경에서 해석한 대로 하나님께 뭐라고 좀 말이라도 해보라는 뜻이었을까요?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당황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해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편 부당한 상황에서 시편 저자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어찌하여’를 외치며 물어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모세도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출5:22) 질문하였습니다.


필립 얀시는 욥기를 고난과 고통에 관한 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욥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며, 시험을 위해 큰 시련을 겪도록 선택된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4)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워놓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보고 싶어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 답해보세요.”

욥기는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고통이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욥기의 답은 피고석에 서야 할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욥)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욥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보았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욥만이 아니라 욥의 부인, 욥의 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신앙 수준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할만한 훌륭한 신앙인 욥이 있는가 하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어찌하여’를 외치며 항변하는 욥의 아내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황은 보지 않고 교리만 생각하고 문자만 바라보는 욥의 친구들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받을 때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였습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베드로는 다시 어부가 되고자 갈릴리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낙오자요, 실패자요, 배반자요, 인생 포기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십니다.

저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나는 네가 배반했던 것, 저주했던 것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런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가 거룩하고 믿음에 굳게 서고 완전하였을 때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 상황에서 질문하였습니다.

음부의 깊은 곳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스올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주님은 찾아오셔서 질문하십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하는 데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은 어떠니? 넌 나를 사랑하니?”


하나님을 피고석에 세우려고 했던 모든 사람,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했던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은 욥의 아내에게도 찾아가 주셔서 같은 질문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했다고 ‘너는 세계 3대 악처’라 낙인을 찍고 외면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돌아보시고, 고통의 신음을 결단코 외면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욥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납니다.

거기 욥과 욥의 부인과 새로운 자녀가 서 있습니다.

욥의 부인은 그 구렁텅이에서 회복된 것이 분명합니다.


신앙 수준이 욥처럼 백 점이 아니어도, 때로 빵점을 맞고 마이너스 점수를 맞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1) 류호준, ‘일상, 하나님 만나기’, 서울 : SFC출판부, 2011년, 385쪽

2) C.S.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강유나 옮김, 서울 : 홍성사, 2004년, 64쪽

3) 민영진, ‘설교자와 함께 읽는 욥기’, 서울 : 한국성서학연구소, 2002년, 48-49쪽에서 재인용

4) 필립 얀시,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전의우 옮김, 서울 : 요단출판사, 2001년,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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