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일은 현숙한 여인이었을까?
국어사전에 ‘현숙하다’는 ‘마음이 어질고 정숙하다’는 뜻이다.
잠언에 ‘현숙하다’의 뜻은 조금 다르다(잠31:10)
잠언에 등장한 현숙한 여인은 이렇다.
그녀는 가정의 주도권을 잡고 하인을 관리한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며 밭을 가꾸고 포도원을 일구며 장사하여 많은 이익을 남긴다.
양털과 삼을 구하여 남편의 옷을 지어 입힌다.
남편의 삼시 세끼를 잘 차려 먹이고 궁핍한 자를 돌보아 남편의 명성을 드높인다.
현숙한 여인은 남편이 귀찮은 일을 전혀 하지 않도록 한다.
이 남편은 도대체 뭐 하고 살까?
그는 아내가 해준 옷을 입고 성문 앞에 나가 온종일 사람들과 노닥거린다.
사람들은 그 남자를 보고 ‘자네 아내는 참 현숙한 여인이야’칭찬하다.
과연 이걸 현숙한 여인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초 슈퍼 우먼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면에 남편은 거의 불한당에 가까운데 오히려 칭찬받는 모습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어색해도 너무 어색하다.
여기서 본문의 타자성이 드러난다.
수천년 전 사회 상황 속에 쓰인 성경은 시대와 문화의 간극을 뛰어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아무리 고대 사회 문화를 공부한다 해도 여전히 성경 본문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아비가일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잠언에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의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아비가일이다.
그녀는 남편을 보좌하여 하인을 관리했다.
그녀는 종들을 훈련하여 남편이 잘못 행동하고 말할 때 바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다윗의 사람들을 홀대했다는 소식을 즉각 보고받았다.
만일 우리가 이런 아내를 두었다면 어떤 느낌일까?
좋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녀는 집안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밝았다.
남편은 갈렙 족의 우두머리였기에 정치적 안건들을 자주 다루었다.
남편 나발은 보수 우파로서 언제나 권력자 사울 편에 서 있었다.
그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였고, 정치 사회 분위기 파악을 잘하였다.
반면에 아비가일은 좌파였다.
그녀는 사울에 반대하여 무장세력을 이끄는 다윗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녀가 언제부터 다윗에게 호감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보통의 이스라엘 여자들처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후부터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그녀는 사울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백성을 진정으로 돌볼 줄 아는 왕이 나오기를 소망하였고, 그 기대를 다윗에게 걸었다.
그런 면에서 나발과 아비가일은 생각이 달랐다.
나발은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하면서 다윗을 배신한 종으로 묘사하였다.
아비가일은 다윗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울 지도자로 확신하였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삼상25:30)
일찍이 사무엘은 비밀리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건 대역죄에 해당하기에 아무도 모르게 행하였다.
이새 집안에서도 자칫하면 가족이 몰살당할지 모르기에 다윗에게 기름 부은 사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것을 공개적으로 처음 언급한 사람은 아비가일이다.
목원대 이경숙 교수는 이를 두고 아비가일의 예언자적 통찰이라고 하였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에 ‘다윗 현실에 뿌리 밖은 영성’에서 이 부분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였다.
눈에 살기를 띠고 분에 겨워 펄펄 뛰면서 나발을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다윗을 막을 자는 없을 것 같았다.
아비가일은 혈혈단신으로 그 길을 막고 무릎을 꿇었다.
이성을 잃은 다윗,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읽어버린 다윗, 광야에서 배운 거룩을 잃어버린 다윗 앞에 조용히 말하였다.
“다윗이여, 원수를 갚는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기 광야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당신이 스스로를 시험해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인하고 꼿꼿한지 알아보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광야는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어리석은 자가 되렵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로 족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깨우쳐 처음 받았던 하나님의 소명을 회복시켰다.
칼로 문제를 해결하는 폭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한 종이 되게 하였다.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는 아비가일 앞에 다윗의 타오르던 분노의 불은 꺼졌다.
겉보기엔 아비가일이 무릎 꿇었지만, 사실 다윗이 아비가엘에게 무릎 꿇은 셈이다.
여기까지 보면, 아비가일은 참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이다.
사무엘서를 쓴 저자는 철저히 다윗 중심적으로 기록하였기에 아비가일을 현숙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아내의 현숙함은 다른 외간 남자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남편이 평가해야 한다.
잠언에서 현숙한 여인의 최고 관심사는 남편의 명예다.
현숙한 여인은 사람들이 자기 남편을 칭찬하고 존경하게 하여야 한다.
아비가일은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였는가?
그녀는 다른 남자 앞에서 자기 남편을 욕하였다.
그녀는 다른 남자 앞에서 자기 남편을 욕하였다.
“그 잔인한 사람 나발이 한 일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는 자기 이름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나발은 바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서는 미련함이 흘러나옵니다”(삼상25:25, 메시지)
그녀는 남편을 미련함이 흘러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아비가일은 지옥 불에 떨어져야 할 여인이다.
그녀는 남편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소한 남편 나발의 눈으로 볼 때 아비가일은 전혀 현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났다.
다윗은 남편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남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다.
물론 살기 위해 그 앞에 무릎 꿇고 사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 내 주인님(다윗)을 위해 일이 잘되게 하시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삼상25:31, 메시지).
“야훼께서 나리의 운을 터주시는 날 이 계집종을 잊지 말아주십시오”(공동번역).
그녀는 다윗을 주인님이라고 하였다.
그 시대 여자가 남자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나는 당신에게 속한 여자’라는 뜻이다.
이는 명백히 유혹적이다.
Rhodes 대학의 구약학 교수인 Steven L. McKenzie(1953~)는 아비가일을 평가하기를 다윗의 품에 들어가려고 기회를 엿보는 여자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많은 여자가 다윗을 흠모했듯이 아비가일도 다윗을 흠모하였다.
현재의 남편 나발보다 다윗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다윗을 사모하였다.
히브리 구약학자로서 Bar-Ilan University 명예교수인 M. Garsiel(1936~)은 아비가일의 설득력은 남자의 본성을 잘 아는 여자의 특성을 보인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모험보다 안정을 추구한다.
따라서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남자를 선호하고, 장래성 있는 남자를 선호한다.
만일 결혼 전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결혼한 후라면 이런 태도는 불륜으로 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윗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지혜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녀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모습을 볼 때 신앙도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 나발 입장에서 보면, 아비가일은 분명 현숙한 여인이 아니다.
오히려 부정한 여자라고 해야 한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마자 애도 기간을 갖지도 않고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
아비가일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으로 갈 수 있다.
사무엘서 저자가 아비가일을 현숙하다고 할 때, 아비가일의 예언적 지혜와 판단을 보고 말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성경 저자는 남편 나발과의 관계를 보고 현숙하다고 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Peterson Eugene H. ‘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Leap Over a Wall), 이종태 옮김, 서울 : IVP, 2001년
Brueggemann Walter, ’ 사무엘 상하’, 한미 공동 주석 편집 번역위원회 편,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년
이경숙, ‘다윗 왕조에 관한 신명기 역사가들의 기대와 비판’, 기독교사상 31(5), 112-131(20p) 1987년
유연희, ‘아비가일의 남자들 : 삼상 25장 다시 읽기’, 구약논단 제16권 1호 (통권 35집) 98-118, 2010년
https://www.youtube.com/watch?v=HGJVCAqxTg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