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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29. 2021

눈 뜬게 죄!, 하갈의 마음

우리는 보통 주인공 의식이 있다. 성경에 주인공이 등장하면, 그 사람이 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읽어나간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관해선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을 두지 않는 정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악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약한 자, 소외당하는 자, 눌린 자들에게 관심을 두신다. 그리고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불과한 보통 사람이다. 성경은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엑스트라와 조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경은 하갈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였다.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창16:1)

아주 냉소적인 소개이다.

“아 그 여자아이, 애굽 출신 노예야!”

우리는 주변에 하찮은 사람을 보면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 그 사람”

호서대 한미라 교수는 하갈은 아브라함이 애굽의 바로에게 선물받은 노예가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1877년 컬럼비아 특별구 경찰서장, 1889년 주 아이티 공사를 역임한 프레더릭 더글라스는 흑인 노예 출신이었다. 그는 흑인으로서 최초로 미국 정부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어렸을 적 흑인 노예 어머니 해리엇 베일리와 헤어질 때를 이렇게 썼다.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과 노인들, 결혼한 사람들과 미혼인 사람들,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면서 말들과 양들과 뿔이 달린 짐승들과 돼지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 먼저 우리 형제자매는 하나씩 차례로 이별을 고하고 떠났다. 그동안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큰 슬픔으로 마비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차례가 되었다. 어머니는 몽고메리 카운티의 아이작 릴레이에게 팔렸다. 그리고 내가 경매대에 올랐다. … 모든 자녀와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반쯤 나간 어머니는 내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무리를 헤치고 릴레이가 서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의 발 앞에 쓰러져 무릎에 매달려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억양과 말투로 자신과 함께 아이까지 사서 최소한 아이 중 하나만이라도 구하기를 간청했다. … 그 남자는 난폭한 주먹질과 발길질로 그녀를 뿌리쳤다. 당시 내 나이는 대여섯 살 정도였다.”


1800년대 미국 노예의 모습이다. 수천 년 전 이집트의 노예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하갈은 자기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아브라함의 노예가 되었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친절하게 대했을까? 창세기를 읽어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녀를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친절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성격이 나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갈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받았다. 노예인 하갈의 의견이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하갈은 생각하면 안 되는 노예였다. 어느 날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니 내 여종(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 생각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좋을지 모른다. 당시 풍습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갈은 좋았을까? 짐작건대 하갈이 10대나 20대였을 텐데 아브라함은 80이 넘은 할아버지였다. 거기 사랑이 있을 턱이 없다. 사라는 하갈의 인권, 하갈의 생각, 하갈의 감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하듯 그녀도 하갈을 그저 소유물로 생각했다.


하갈은 어느 날 자기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아브라함과 잠자리를 해야 했다. 그때 하갈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 순간 하갈의 마음이 궁금하다. 아무튼, 하갈은 임신하였다. 아무리 노예지만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대우가 달라졌다. 최소한 먹는 것이나 잠자리가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갈의 법적 지위가 달라지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다.


그때 혹시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이를 낳으면 나의 신분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여성이 임신하면 아이와 자신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기 마련이다. 그녀는 노예로서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했다. 그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노예는 물건이기 때문에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하갈은 자신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16:4-5)


여기 멸시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였다. 멸시라는 뜻은 히브리어로 칼랄인데 이 단어는 ‘가볍다’, '사소한 일이다,' '경히 여기다,' '가볍게 취급하다,' '경멸하다,' '저주하다' 등 다양한 뜻을 가진다. (??? to be light, be slight; to be swift; to be lightly esteemed, be despised.

????? Qal - ??? 1 was slight, abated; 2 was swift; 3 was of little account, was lightly esteemed, was despised. ) 한글 성경 번역자들은 이 다양한 뜻 중에 ‘멸시’를 선택했다. 과연 이게 합당한 번역일까? 당시 노예가 주인을 멸시하는 눈으로 쳐다볼 수 있었을까? 오히려 ‘가볍게 보았다’가 맞지 않을까? 임신한 몸으로 거동이 불편해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노예 소녀 하갈을 사라가 그렇게 본 것이 아닐까?

“어 저 아이가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고 굼뜨게 행동하네. 건방지네”


뭐 어떤 해석이든 좋다. 흥미로운 점은 4절에서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볼 수밖에 없던 하갈이 이제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주인 사라도 하갈이 보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았다는 것이다.


“하갈이 날 멸시하는 눈으로 보네!”

이건 물론 사라의 생각이다. 어쨌든 하갈은 자신과 주인과 세상을 자기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자기의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체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눈이 열렸다. 이전까지 보았던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 전혀 다른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건 신앙의 눈이다. 그러면 하갈은 어떤 눈을 뜨게 되었을까? 그녀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갈이 만난 하나님, 하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곧 우리에게도 매우 의미 있다. 그건 우리도 성경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갈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https://youtu.be/-zt3J3naC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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