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유모
리브라는 이삭에게 시집올 때 하란 친정집에서 유모 한 사람을 데려왔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창24:59)
리브가가 갓난아이도 아닌데 유모가 따라오다니 조금 이상하다. 차라리 여종을 데려오는 게 리브가에겐 더 좋았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여종들은 대개 주인보다 나이가 어린 종으로 나타난다. 리브가의 경우만 예외적인 경우이다. 물론 고대 중근동 부유층 사람들은 딸이 시집갈 때 딸에 대하여 잘 아는 유모를 딸려 보내는 경우가 있기 하다. 그렇지만, 달랑 유모만 딸려 보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아무튼, 성경은 유모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창35:8)
유모의 이름은 드보라이다. 그녀는 왜 살아생전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다가, 죽음의 자리에서 이름을 밝혔을까? 그녀가 누구보다 신실하고, 진실하였기에 죽음의 자리에서 이름을 기록함으로 그녀의 삶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리브가의 죽음도, 레아의 죽음도 언급하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은 유모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녀의 매장지와 그곳 이름을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여성의 죽음과 매장지를 밝힌 경우는 흔치 않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죽었을 때,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고(창23:19), 야곱의 사랑하는 부인 라헬이 죽었을 때 베들레헴에 장사하였다(창35:19). 그렇지만 누구도 매장지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매장지에 알론바굿(Allon-bacuth ; 통곡의 상수리나무)이라 이름 붙였다. 이는 야곱 일행이 그곳에서 드보라의 죽음을 추모하고, 장례를 치르며 통곡하였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야곱이 고향 땅에 돌아와, 어머니 리브가의 무덤을 찾아가 통곡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에서도 울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무덤 앞에서 그는 통곡하였다. 내가 만일 소설가라면 여기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았을 것이다.
조선 왕조 실록 중종 편에 보면 의녀 장금의 기록이 몇 번 나온다. 몇 줄 안 되는 기록에 의지하여 드라마 작가 김영현 씨와 이병훈 PD는 대하드라마를 만들었다. 기독교 영화 제작자들이 드보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성경학자들이 보는 드보라의 모습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에 성경학자들은 무어라 말하는지 살펴보았다. 독일의 구약학자 폰 라드(Gerhard von Rad,1901-1971)는 리브가의 유모가 어떻게 야곱 일행에 가담했는지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아마도 대답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한남대 천사무엘 교수는 야곱에게 있어서 드보라는 어머니 리브가를 대신할 인물이었다고 추측하였다. 다만 야곱의 귀향 행렬에 드보라가 함께 한 이유에 대해선 야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하러 나갔다가 합류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렇다면 20년 이상 떨어졌다 만난 유모 드보라의 죽음 앞에 대성통곡할 일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어머니 리브가의 무덤에 찾아가 통곡해야 더 논리적이다. 야곱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어머니, 야곱이 복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어머니 리브가의 무덤을 찾아가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천사무엘 교수의 말은 조금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백석대 송병현 교수는 좀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성경 저자가 이 시점에서 드보라의 죽음을 언급한 이유는 아브라함 집안과 하란에 있는 라반 집안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었음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야곱이 삼촌 라반 집에서 가져온 이방 신상과 귀고리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다 묻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창35:4)
이방 신상과 귀고리를 묻은 것은 삼촌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겠다는 뜻이 맞다. 그러나 35장 8절에 이르러 야곱이 드보라를 상수리 나무 아래 매장하였지만, 그곳은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창35:8).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하란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리브가가 시집올 때부터 계속하여 이삭 집안의 사람으로 충성 봉사하였기에 이제는 이삭 집안사람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따라서 송병현 교수의 해석도 조금 부족한 면이 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리브가는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날 때 했던 약속에 근거하여 드보라를 야곱에게 보낸 것으로 이해하였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창27:45).
리브가는 이삭에게 곧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유대 전통은 그 사람이 바로 유모 드보라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성경학자들은 그때 드보라의 나이를 130세 넘은 할머니로 추정하여, 유대 전통이 상식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주석가들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나이를 130세로 추정하고선,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짐작하건대 리브가의 유모라고 했으니 리브가보다 최소 20살 많고,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날 때도 40살 때라고 생각하였기에 그런 나이가 나온듯 하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은 조혼이 풍습이었으므로 리브가가 결혼할 때 나이는 십 대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유모라고 해서 꼭 엄마뻘 나이로 추측할 필요는 없다. 만일 어린 리브가가 자랄 때 그녀와 함께 놀면서 그녀를 돌보던 여자를 유모 드보라로 추정한다면, 드보라의 나이는 리브가보다 5,6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친구 같은 유모였기에 시집올 때 리브가와 함께 따라왔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날 때도 40대가 아니라 20대라고 추정하면, 유대 전승에 따른 해석에 타당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유대 전통을 상당 부분 수용하여 이 부분을 해석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썼다.
“아마 드보라가 야곱을 길렀으므로 어려서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의 추방 이유를 알게 되자 신앙에 대한 존중심에서 그를 따라갔을 것입니다.”
드보라는 하란 출신이고, 라반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기 때문에 객지에서 홀로 살아야 했던 야곱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리브가는 이점을 알고 드보라를 야곱에게 보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드보라는 외로운 타향살이를 했던 야곱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물론 낳아준 엄마는 리브가이지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키워주고 길러준 드보라를 엄마처럼 존경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드보라는 하란의 풍습과 문화와 라반 가족 사이에 있었을 갈등과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야곱의 상담자가 되고, 좋은 충고를 해주었을 것이다. 홀로도니 야곱에게 드보라는 큰 의지처였고, 고난을 함께 견뎌낸 엄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칼빈은 드보라는 경건한 여자로서 모든 면에서 야곱에게 큰 모범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칼빈의 해석에 동의하면서, 드보라의 나이 문제만 잘 해석한다면, 창세기 35장 8절에 야곱의 일행에 드보라가 함께 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 에서와 화해하고, 고향 땅에 돌아오기까지 드보라는 그를 지켜주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단지 책임감으로 감당한 것이 아니라 야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충성하였다. 드보라의 죽음 앞에 야곱이 통곡하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삶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칼빈은 그녀가 신앙의 모범까지 보여주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드보라는 처음엔 이름없는 여자로 등장하였지만, 그녀가 죽었을 땐 그녀의 이름이 기억되고, 야곱의 가족 모두가 그녀를 존경하고 크게 통곡하였다. 성경은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과 죽음과, 매장지 이름까지 기록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고후6:9)라고 하였다. 세상에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이름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주시고, 생명 책에 기록하신다. 하나님의 원리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은 큰일보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더 귀하게 보신다. 큰 일은 사람들 눈에 띄고, 박수도 받고, 인정도 받지만, 적은 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다면, 그의 이름은 완전히 잊힐 것이다. 성경엔 드보라처럼 이름없는 허다한 증인들이 신실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갔다(히12:1). 세상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며, 성공과 승리를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앞에 있는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세상에선 십자가를 기꺼이 참고 견뎌내신 예수님처럼 부끄러움도 수치도 모욕도 견디는 이름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비록 약한 자이고, 이름없는 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창세기에 비록 단 두절 기록하였지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바로 우리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엔 드보라처럼 이름 없이 살아간 신앙의 선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사람들은 다 헤아리지 못해도 하나님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기억하실 것이다.
참고 도서
Gerhard von Rad, Das erste buch Mose : Genesis (국제성서주석, 창세기) 한국신학연구소, 1988
천사무엘,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 창세기, 대한기독교서회, 2012
송병현, 엑스포지멘타리 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 2011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창세기2, 성서교재간행사,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