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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4. 2021

박대받은 아내, 사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사랑받았을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사랑하였다(창24:67).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아내 라헬을 사랑하여 칠 년을 며칠같이 지냈다(창29:18,20,30).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사랑했다는 말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아브라함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사실 우리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 사라가 처음 등장할 때 ‘저주받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창세기 11장에는 사라의 모습을 아주 간단하게 서술하였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창11:30).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하나님께 저주받았다고 생각하였다. 조선 시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조건 일곱 가지를 칠거지악이라 불렀다. 첫 번째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 자녀를 출산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주는 것은 여자의 가장 큰 의무 중 하나였다. 특별히 유목사회인 고대 중동에서 아들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였다. 성경에서 아들에 대한 가장 강한 집착을 보인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여인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사는 삶은 어떨까? 조해진 작가가 쓴 ‘환한 나무 꼭대기’에 표현을 빌리면,‘날마다 그녀의 일부가 하수구로, 하수구의 구정물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창세기 11장에 임신하지 못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로 표현한 짧은 문장 속에 사라의 긴 설움과 애환이 스며 있다. 남편의 기대, 시아버지의 눈총, 주위 사람들의 멸시하는 눈을 의식하며 그녀는 날마다 힘겹게 살아갔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낳았다. 그 긴 기간에 아브라함의 간절함, 초조함, 아들에 대한 갈망과 실망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 모든 감정에 책임을 져야 했던 사라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민족에 대한 비전을 주면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였다. 물론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떠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결단에는 아이를 낳고 큰 민족을 이룰 수만 있다면, 고향을 백번 천 번 떠나라고 해도 떠날 수 있었던 인간적인 요인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자녀를 간절하게 소망하였다.


부부관계가 정상적이었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명과 비전을 받았을 때 부인에게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큰 민족에 대한 소망, 자녀 손이 창대해지리라는 비전을 들었을 때 사라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만일 하나님의 비전이 사실이라면, 임신할 수 없는 자신은 그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할 수 없는 실존적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저주받은 여자 사라는 남편이 하나님에게 들었던 말씀과 비전을 나눌 때 함께 기뻐할 수 없는 큰 슬픔이 그녀의 가슴에는 있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약속에 자신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그녀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남편을 따라다니면서도 사라는 언제나 가슴에 큰 납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 땅으로 내려갔을 때 남편은 사라에게 제안하였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여자요.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 당신이 내 아내인 줄 알고 나를 죽이고 당신은 살려 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그들에게 내 누이라고 말하시오. 그러면 당신 덕택에 내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좋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오.”(창12:10-12, 현대인의 성경)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디 있을까? 이 일은 한 번이 아니었다.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였다. 콜롬비아 대학의 나오미(Naomi A. Steinberg) 교수는 아브라함이 자기 부인 사라를 제거할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만약 사라만 없다면, 아브라함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새장가를 들어 자녀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남편의 말에 사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저주받은 여자가 남편을 죽음의 자리에 모느니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녀는 하나님에게도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여자였다. 그녀는 사랑은커녕 버림받은 여자 취급받았다.


감신대 왕대일 교수는 창세기 18:11-12절을 근거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부부 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1-2).

11절의 ‘생리’는 히브리어 특유의 말장난으로 ‘부부 관계’를 뜻한다. 12절에서 사라가 독백하기를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했는데 이 역시 부부 관계를 뜻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부부 관계를 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이도 들었고, 부부 관계도 없고, 사랑도 받지 못하고, 아이도 낳지 못하는 사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절망, 외로움, 상실, 두려움, 분노, 원망. 그녀는 정말 하기 싫었지만, 자기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자고 아브라함에게 제안하였다. 이제 자신에겐 소망이 없음을 완전히 인정하였다. 모든 소망과 기대를 접었다. 사라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다행히 고대 사회에서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여주인의 아이로 인정했다. 그러므로 고대 사회에서 여주인이 여종을 시기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야곱의 부인 라헬과 레아가 아기 낳기 경쟁을 벌였을 때, 여종을 통해 낳은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인정했다. 라헬과 레아는 여종을 전혀 시기하지 않았다. 시기는 본처 사이에서, 이를테면 라헬과 레아 사이에서나 있을 수 있지 여종을 시기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사라는 하갈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였다. 왜? 그건 사라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뜻이고, 이제는 아내의 자리마저 위험하다는 뜻이다. 사라가 하갈을 쫓아내려고 한 것은 두 번이었다. 한 번은 하갈이 임신했을 때고, 또 한 번은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다. 처음 하갈을 쫓아낼 때 아브라함은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창16:6)


그러나 두 번째 사라가 하갈을 쫓아내려 할 때는 아브라함이 근심하였다(창 21:11). 사라와 부부 관계를 하지 않고 하갈과 부부생활을 한 지 십수 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사랑했던 여자는 사라가 아니라 오히려 하갈이었다.


유대의 랍비 문헌 “미드라쉬 라바”는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정식 부인으로 맞이한 그두라는 사실 하갈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아버지 장례식을 치렀다(창 25:9). 이로 보건대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완전히 쫓아내어 두 번 다시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대 랍비 문헌대로 오히려 아브라함이 하갈을 정식부인으로 받아들인 것이 더 논리적인 것 같다. 결론적으로 사라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자였다.


그녀는 평생 불임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그녀의 아픔과 눈물과 절망감을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몸종이었던 하갈을 학대하고 미워하고 쫓아내려 한 사라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자적으로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자녀를 뜻한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자녀는 이삭, 이스마엘,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등이다. 그러나 그들을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사라가 낳은 이삭만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였다. 바울은 말하였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롬 9:7).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아브라함의 씨’라기 보다는 ‘사라의 씨’다. 그러므로 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보다는 사라에게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는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저주받은 불임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 희망없는 사라를 향한 아주 특별한 계획을 가지셨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바로 사라, 그녀를 통하여 낳은 자녀를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비전과 계획은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구원역사의 계획에 사라를 생각하였다.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었던 사라는 장차 보여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없었기에 평생을 긴 한숨과 눈물과 분노와 절망을 안고 살았다. 만일 그녀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내다보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졌더라면, 그녀는 생각만큼 고달픈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을 몰랐기에,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기에 그녀는 어두운 나날을 보냈다. 시간의 한계속에 사는 우리도 사라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어둡고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를 내다보시고 역사의 결론을 찍으실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면 우리는 비록 펜데믹같은 어두운 기간이라 할지라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의 결론을 볼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깊은 수렁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절망과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 하수구 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나 약한 자를 들어 쓰시기를 기뻐하신다.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을 살피시고, 소외당하는 주변인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모든 약한 자에게 복음이다. 사라는 개인적으로 볼 땐 거의 전 인생을 불행하게 살면서 소망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향한 계획과 비전과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라를 통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셨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참고문헌

정일승, ‘하갈은 과연 약자 혹은 희생양인가?’, 구약논단 제17권 1호 (통권 39집), 33-58, 2011년

왕대일, ‘사라의 웃음과 하갈의 울음’, 세계의 신학 (13), 50-78, 1991년

이환진, 이집트 여종 하갈의 엘로이’, 세계의 신학 (27) 66-88, 1995년

https://www.youtube.com/watch?v=t59qI2rTv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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