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의 차별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다.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란 자부심이 있었다. 거룩한 백성은 온전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기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부정하다고 차별하였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인 소와 양도 흠 없는 깨끗한 것을 드렸다. 몸에 피부병이 있으면 부정하다 여겨 성 밖으로 내 쫓았다. 그들이 차별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방인이고, 둘째는 여자이고, 셋째는 귀신들린 사람이다. 이방인은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개 같은 민족이라 여겨 차별했다. 여성을 차별하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여자는 수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여 언제나 성인 남성만 계산하였다. 그중에도 가장 차별한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이다. 그들은 명백히 사탄에게 속한 자로 보았다.
사실 이러한 차별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근처 모든 민족이 똑같았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녀는 세 가지 차별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두로와 시돈에 사는 이방인이었다. 그녀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다. 세 가지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이 여인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차별과 멸시와 천대를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다층적인 제도적 억압’을 받았다(González, p196).
그러나 이 모든 차별을 뛰어넘을 힘이 있었다. 그건 어머니의 힘이다. 그녀는 귀신들린 딸이지만 사랑하였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고쳐주고 싶었다. 딸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그녀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귀신을 쫓아내며, 각색 병을 고친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동네 근처로 오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성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신분차별 등 모든 차별을 뛰어넘어 예수님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마15:22).
그때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그 여인의 간절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셨고, 나아가 그녀를 향하여 개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흔히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감신대 이미경 교수는 다르게 해석한다. 예수님은 여인을 단순히 테스트한 사건을 넘어서, ‘당시 일그러진 세계 상황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text로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이미경, p78-9). 사람들은 ‘타자를 차별하거나 지배하거나 추방하거나 파괴하기 위해 그들을 비인간화’(Volf, p115)한다.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을 개라고 하거나, 여자는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하거나,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면 바알세불에게 집혔다고 하면서 그들을 ‘비인간화’하였다. 차별이 난무한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마땅히 포용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여야 할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타자를 차별하고 배제하였다.
하나님은 이미 신명기를 통해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가르쳤다. 이방인과 나그네를 환대하고 그들이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공평하게 대우받도록 하였다.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보호하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그들이 만든 인간적 전통과 규례를 따라 살았다. 종교라는 껍데기를 썼지만, 실상은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자들이었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그러한 사회 상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 이러한 차별 현실을 깨트리고자 하였다.
예수님의 이러한 시도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반응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여인의 반응은 매우 중요하다. ‘대화란 홀로 완결될 수 없다. 타자의 말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인의 말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육화적이고 새창조적인 담론이 비로소 완성을 향해 나갈 수 있다”(이미경,p85).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좋은 파트너가 될 줄 아셨다. 그래서 아주 예외적이고, 예수님답지 않은 반응을 보이므로 당시 차별화된 일상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마치 지독한 차별주의자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였다. 첫째 예수님은 여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침묵은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대화하기 싫은 사람,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상대방과 대화하기는 쉽지 않다. 데이비드 번즈는 누군가 ‘말문을 닫는다면’ 그건 ‘상대방을 비판한다’는 뜻이며, ‘침묵으로 벌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침묵은 상대방의 관심사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차별주의자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마틴 부버는 ‘일체의 감각적 매체(언어) 없이’ 단지 태도나 자세만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Buber, 9). 예수님의 침묵은 무언의 비판이요, 무시였다. 이런 경우는 대화를 이어가기가 정말 어렵다. 여인은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더욱이 제자들은 우는소리 하는 여인을 쫓아내라고 예수님께 청원하였다(마15:23). 때때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차별과 소외와 폭력적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있다. 한 사람이 차별해도 서러운데, 무리를 지어 차별하면, 정말 최악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더 매몰찬 말을 하였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예수님은 첫 번째 차별조건, 즉 이방인 차별을 언급하였다. 정말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처럼 이방인을 개와 같이 멸시하고 차별하였을까?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요1:11)했다. 예수님은 당시 지배 계층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과 제사장에게 거부당하였다. 예수님은 차별과 배제와 멸시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은 차별주의자인 것처럼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면, 그는 이 텍스트(예수)를 잘못 읽은 것이다. 예수님은 ‘비록 자신은 거부당했지만,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율법과 은총 사이에 놓인 장벽을 무너뜨린 화해자’였다(이정용, p123).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의 본 마음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딸이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간절히 말하였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15:25).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어머니들은 자녀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홍영미는 ‘모성의 힘은 도전과 저항의 힘이며, 모든 전략과 지혜의 원천적인 힘’이라고 하였다(홍영미, p142). 그녀는 어머니로서 어떤 차별과 억압도 뚫고 나갈 힘이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더욱 충격적인 말을 하였다. 평상시 예수님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
이건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이요,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이다. 개라니!!! 차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모욕감과 수치심을 주는지 알지 못하고 할 때가 종종 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다. 말로 하는 폭력은 실제 폭력만큼이나 잔인하다.
바클레이는 예수님께서 ‘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좋게 해석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용한 개(Kunaria)는 애완견을 뜻한다고 하면서 “말이란 말하는 사람의 어조나 표정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주 딱딱한 말도 미소가 있으면 그 어조가 부드러워진다. 우리는 친구를 부를 때 “장난꾸러기””나쁜 놈”이라고 불러도 웃으면서 기분 좋은 어조로 말하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애정과 친근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웃음을 띤 예수님의 얼굴과 동정이 서려 있는 그의 눈빛이 그녀에게 혹독한 모욕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Barclay, p168)고 하였다. 바클레이는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님은 일부러 심한 말을 하였다. 그건 언어폭력이었다. 이런 언어폭력 앞에 보통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맞받아 치거나(blaming) 겁을 먹고 숨는(hiding) 경우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제3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건 인정하기(admitting)였다.
“저보고 개라고요, 예 저는 개 맞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늘 그런 식으로 그녀를 욕하고, 차별하였다. 그녀는 말도 안 되는 현실, 왜곡된 삶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차별하고, 멸시하고, 모욕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인정하는 말 속에는 당시 사회의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녀는 말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이 여인의 말은 결코 비굴하지 않다. 세상의 편견과 왜곡과 차별과 소외와 멸시와 천대 앞에 그녀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자신을 개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았다. 세상이 자신을 향하여 아무리 모욕해도 그녀는 모욕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당당한 자아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당당히 말했고, 해방과 회복을’ 얻었다. 그건 그녀가 만난 사람이 정의롭고 선하신 주님이었기에 그 당당함이 먹혀들어갔다(González, p212). 에스더 왕후 같은 경우는 자신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가 말해야 했지만,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악한 왕이나, 부패한 관료들 앞에서 여성의 당당함이 항상 먹혀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이 만난 사람은 바로 위로자요 치료자인 예수님이었기에 그 당당함이 빛을 발하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패배를 인정하였다. 누구하고 논쟁해서 패배를 당한 적이 없던 예수였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에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였다.
“졌다! 너의 말을 인정한다!”그건 정말 기분 좋은 패배였다. 사실 그건 예수님의 패배가 아니라, 차별하는 태도를 보이는 유대인과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의 패배다.
예수님은 이미 수로보니게 여인이 다가올 때, 그녀의 건강한 자아와 간절한 마음을 보셨다. 그리고 이 여인과 한판 승부를 통해 당시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관, 세계관을 깨트리고 싶었다. 그건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보이는 차별하는 자세와 왜곡된 가치관을 깨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마음과도 연결된다. 예수님과 멋진 합을 맞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너무나 멋지다. 예수님은 그녀를 인정하며 말하였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8)
오늘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칭찬을 받는다면, 세상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참고도서
Barclay William, The Gosple of Matthew(바클레이 성경주석 마태복음 하), 기독교문사, 2009
Buber Martin, Between Man and Man(사람과 사람 사이), 남정길 옮김, 전망사, 1991
Burns, D.David, Feeling Good Together(사람 때문에 매일 괴로운 당신을 위한 관계수업 E-book), 차익종 옮김, 흐름출판, 2015.
González Karen, The God Who Sees(보시는 하나님), 박명준 옮김, 바람이불어오는 곳, 서울, 2021
Volf Miroslav, Exclusion and Embrace(배제와 포용) , 박세혁 옮김, IVP, 2014
이정용, Marginality(마지널리티), 신재식 옮김, 포이에마, 2014
홍영미,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에 대한 윤리학적 해석’, 연세대학원 신학과 박사논문, 2005.
이미경,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 이야기에 나타난 이중적 담론, 개-되기, 모성성 탐구, 한국여성신학 (89) 2019. 6, 75-98(2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