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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22. 2022

야곱의 딸 디나의 강간 사건

창세기에는 성폭행을 당한 디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찌보면 특별한 의미를 찾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디나 사건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하고 추리합니다.


창세기 34장은 디나를 아주 이상하게 소개합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창34:1)

성경은 통상적으로 ‘누구의 아들’이나 ‘누구의 딸’이란 표현이 나올 때 그 ‘누구’는 아버지입니다(송봉모, p.4). 그런데 마치 디나는 야곱과 별 관계가 없다는 듯 레아의 딸로 소개합니다. 학자들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가 낳은 딸이었기에 더욱 사랑받지 못하였다고 추측합니다(Karssen, p.80). 그건 세겜 족장의 아들이 디나를 성폭행하고 억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딸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든지, 아들들을 불러 모았다든지, 분을 내었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이렇다 할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있었습니다(창34:5). 디나의 소식에 속상해하면서 분을 낸 사람은 레아의 아들 중에 시므온과 레위뿐이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 사건을 해석하는 성경해석자들의 태도입니다. 고든 웬함은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라는 본문을 해석하면서 ‘나갔더니’의 의미에 부도덕한 의미, 즉 성적 관계를 내포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품위를 떨어뜨리는 아슬아슬한 짓을 하였다고 해석하였습니다(Wenham, p.551). 송병현 교수는 ‘그 땅의 딸들’이라는 표현이 창세기 안에서 부정적 뜻을 가지는 것으로 그녀들과 사귀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송병현, pp.599-600). 칼빈은 중세적 관점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였습니다.

“디나는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서 정도 이상으로 자유롭게 배회했기 때문에 겁탈을 당했다. 사도가 가르치고 도리가 명하는 대로 그녀는 조용히 집 안에 있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소녀들에게는 미덕이 어울리기 때문이다”(Calvin, p.266).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정말 어이없는 해석입니다. 심지어 사르나(Nahum Sarna)는 디나가 ‘나갔다’는 표현은 성적 난잡함을 함축한다고 하였습니다(정일승, p.37). 김휘현 목사는 디나가 히위 족속의 여자들을 보러 나간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불신행위로 보았습니다(김휘현, p.97)


피해를 본 사람은 디나인데, 오히려 디나가 문제여서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남성 중심의 해석입니다. 성경은 디나의 의도가 어떤지 전혀 밝히지 않고 아주 중립적으로 표현합니다.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그냥 사실을 묘사했을 뿐인데 여기에 온갖 불순하고 나쁜 의도로 덧씌운 것입니다.


사실 세겜에 거주하기로 한 사람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세겜 족속에게 땅을 샀고 거기에 제단을 쌓았습니다(창33:18-20). 야곱 일행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 여겼고, 그곳에서 살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런 가나안 땅에서 칼빈이 말한 대로 여자는 집 안에만 있어야 하나요? 그런 사고방식은 여성의 인권을 철저히 제한하는 이슬람 사회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나 야곱의 부인 라헬은 양을 치는 여자로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일했습니다. 여자가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디나의 외출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해석은 맞지 않습니다.


남성 위주 사회에서는 여성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여자가 예뻐서, 여자가 유혹해서, 여자가 헤퍼서 성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잘못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입니다.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이 디나를 성폭행한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고대나 지금이나 중동지방에서 흔한 일입니다. 특별히 보쌈은 예전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악한 풍습으로 고대 중동에선 흔한  일이었습니다. 신명기는 이런 경우, 적절한 보상을 하도록 규정하므로 당시 악행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신22:28-30). 그렇다고 성폭행이 정당화될 순 없습니다.


디나 사건을 해석하는 또 다른 견해는 유대의 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상호 결혼에 대한 거부감과 배타성을 디나사건에서 찾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쿠겔(James Kugel)교수는 바벨론 포로 후 제2 성전기, 유대 랍비의 해석 전통을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시므온과 레위가 하나님에게서 신비로운 칼을 받아 세겜 족속을 전멸하였다고 해석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 이방의 세겜 족속을 멸하였다고 해석합니다”(Kugel, pp.3-20)

유대 랍비들은 이방 민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분노를 디나 사건에 투영하였습니다.


문제는 기독교학자나 목사 중에도 유대 전통을 그대로 받아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일 헤머는 야곱이 디나사건을 계기로 한 민족 되려고 했던 것을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로 이루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인간의 분노와 의도를 뛰어넘어 유지된다고 하였습니다(SailHamer, pp.378-380). 박영선 목사 역시 세일 헤머와 동일한 방법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디나의 강간 사건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를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시키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박영선, p.114)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정말 순수 혈통을 유지하였나요? 유대민족은 혈통으로 세상과 구별된 민족이 아닙니다. 유다는 가나안 여인 다말을 며느리로 받아들였고, 야곱의 자손 대부분은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여인과 결혼했고, 모세는 구스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다윗의 혈통도 여리고 여인 라합과 모압 여인 룻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할 것이며(창12:3),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창17:5). 아브라함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신앙으로 모든 민족의 아버지, 즉 믿음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베풀 때, 직계 자녀에게만 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집에 거하는 모든 이방인, 돈으로 산 자나 집에서 기른 자를 막론하고 다 할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을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이종우, p.237).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므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세겜 족속은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아직도 청동기 시대이고, 대부분은 돌칼을 사용하던 시기이기에 성인이 할례 받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중대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보다 몇백 년 후인 모세 시대에도 돌칼을 사용하여 할례를 행하였습니다(출4:25).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라는 종교의식을 살인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랍비들이 주장하는 유대 혈통의 순수성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하란으로 사람을 보내 며느리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동생 디나의 의견이나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디나의 행복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디나가 다시 야곱의 집으로 돌아온 후 행복했을까요? 자기 눈앞에서 세겜 족속이 모두 살해당하는 것을 본 후유증은 얼마나 오래갔을까요? 성경은 그 후 디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다가 요셉의 초청으로 야곱 가족 전부가 이집트로 내려갈 때 잠깐 언급합니다(창46:15). 그때 디나의 남편이나 자식을 언급하지 않고 디나만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홀로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동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므온과 레위와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의 모든 것을 약탈했습니다(창34:27-29).


그들은 세겜에서든, 벧엘에서든, 애굽에서든, 바벨론에서든 어디서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종교를 핑계로 분노를 표출하였고, 욕심을 드러냈으며,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르기 쉽다는 가장 단적인 예를 디나 사건에서 보여줍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 노력이 종종 실패로 점철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몇몇 다른 이유가 있지만, 또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한 가지 주요한 이유는 우리 모습이 우리가 선포하는 그리스도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Stott. p.43).


참고도서

Karssen Gien, Her Name is Woman vol II(믿음의 여인들 2), 양은순 옮김, 생명의 말씀사, 1991.

Kugel James, The Story of Dinah in the Testament of Levi, Harvard Theological Review 85 (1992), 1-34.

SailHamer H. John, The Pentateuch as Narrative(모세 오경), 김동진 역, 새순출판사, 1994.

Stott R.W. John, The Radical Disciple(제자도), 김명희 옮김, IVP,  2010

Wenham J. Gordon, Genesis16-50, WBC 2(WBC 성경주석, 창세기 하), 윤상문, 황수철 옮김, 솔로몬, 2006.

김휘현, 목사님 궁금해요 1, 예영B&P, 2009.

박영선, 야곱과 아들들, 세움, 2012.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 2011.

송봉모, 디나가 성폭행 당한 사건에 대한 심층적 분석, 신학과 철학 제5호 35, 2003.

이종우, 선교적 기회로 본 디나 사건의 재조명, 복음과 선교 제19집, 2012. 229-264

정일승, 원인론적 관점에서 읽는 디나 이야기, 성경원문연구 (37) 2015.10, 34-57.


https://youtu.be/aFouSwq-i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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