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욕을 먹었다(눅7:34,마11:19). 이때 ‘죄인’은 누구인가? 누가 누구를 향해 ‘죄인’이라고 하는가?
지금까지 기독교에서는 ‘우리는 모두 죄인’이란 말을 쉽게 사용했다. 이때 ‘죄인’이란 말에 무게감을 두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죄인’이란 말을 단순히 개념적이고 신학적인 뜻을 가진 보통명사처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을 향하여 “넌 죄인이야’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빠진다. 그건 보통 명사가 아니라, 상대방을 실제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죄는 헬라어로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거나 ‘표적을 맞히지 못하였다’는 의미로 하마르티아(Hamartia)를 사용한다. 이때 죄는 인간의 본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보통 명사의 죄를 의미한다. 그러나 ‘행악, 불의, 불법, 부정’을 뜻하는 아디키아(adikia)는 하나님의 기준을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의 악행을 의미한다. 누가 자신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지목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할 때 그 ‘죄인’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란 의미로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과 어울리는 사람들은 악행을 일삼는 ‘죄인’으로 보았다. 그건 반대로 자신들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이고, 예수님과 어울리는 사람들은 불결하고, 죄로 더럽혀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어떤 기준으로 예수님과 어울리는 사람을 ‘죄인’이라 했을까?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죄인’은 단지 ‘사악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타락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추방된 사람,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 이방인과 사마리아인, 특정 분파에서 해석하는 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까지 아우르는 말’이다(Volf, p110). 예레미아스는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당시 사회 계층을 분류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사제직과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과 족보를 가지고 있는 평민 귀족들은 상층 계급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하층민이었다. 이러한 하층민을 히브리어로 암 하레츠(‘am ha-arez, 땅의 백성)라고 하였다. ‘땅의 백성’이란 말이 처음부터 하층민을 뜻하진 않았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땅의 백성’이라고 하였는데(출5:5), 이것은 ‘천민들’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그러나 열왕기서에선 유다 민족을 ‘땅의 백성’으로 표현하였다(de Vaux, p145). 이는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의미가 아니라 보통 명사처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땅의 백성’은 사마리아인들,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 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에스라 4:4,9:1).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하나님 신앙을 종교화하여 유대교를 만들면서 ‘땅의 백성’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랍비 시대가 되면서 율법을 모르거나 지키지 않는 자들을 가리켜 ‘땅의 백성’이라고 하였다(de Vaux, p147). ‘주후 135년 이후 시기에 활동했던 랍비들은 자신들의 방식에 따르지 않았던 모든 사람을 열등한 족속’ (Wright, p413)즉 암 하레츠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교도와 다름없는 자’로 규정되었고, 일반적으로 죄인이라 불렀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랍비 문헌을 연구하여 예수님 당시 ‘암 하레츠(땅의 백성)’의 명단을 발표했다. 소위 비천한 직업의 명단인데 굉장히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한다. 당나귀몰이꾼, 낙타 몰이꾼, 뱃사공, 마부, 목동, 소매상인, 의사, 푸줏간주인, 개똥 수거자,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 금세공, 아마 빗 제조자, 절구석공, 행상인, 직조인, 이발사, 빨래꾼, 사혈시술자, 목욕탕관리인, 투전꾼, 고리대금업자, 비둘기경주자, 안식년에 과일장수, 세금징수관리, 세리 등이다(Jeremias, p383).
랍비 예후다(주후 150년경)는 의사들과 푸줏간 주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가장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으며, 아무리 품위있는 푸줏간 주인일지라도 그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의 친구이다”(Jeremias, p385). 대체로 성직자, 귀족, 율법학자, 부자들은 ‘헬레니즘 성향과 친로마 성향’이 강했다(Strauss, p230). 반면에 하층민은 로마의 혹독한 세금 아래서 빈곤한 삶을 겨우 이어갈 뿐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 소위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과 빈번히 어울리셨다’(Strauss, p831).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악평을 들어야 했다.
당시 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선을 그어놓고 선 밖에 있는 사람과 선 안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였다. 그들이 정말 큰 악행을 저질러서 죄인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기들이 그어놓은 선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칭하여 죄인이라 하였다. 인간은 고대로부터 선 긋기를 좋아한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손해를 끼치는 사람, 괴롭게 하는 사람을 원수라 부르며 선을 그었다. 선을 긋는 기준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먹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 선의 기준점은 ‘나 자신’이다. 나의 편이면 좋고, 나를 반대하면 나쁜 사람이다. 내가 커지면, 정치적 집단이나 종교적 집단이 된다. 개인과 개인의 선 긋기는 다시 재조정이 가능할 정도로 약한 선이지만, 집단의 선 긋기는 굵어지고 깊어져 재조정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심하면 히틀러의 지도로 아리안 족이 유대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인종학살(Genocide) 같은 짓을 저지르고, 타종교와 타민족을 악이라 규정하고, 나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공포심과 불안감(phobia)을 조성하여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선 긋기 대가들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인이라고 개 같은 민족이라 선을 그었다.
이방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문둥병자들은 부정하다 하여 성 밖으로 내몰았다. 로마의 하수인이 되어 세금을 걷는 세리들은 민족의 배신자라 경멸하였다.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헌금도 제대로 못 하고, 율법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이라 무시하였다. 창문 뒤로는 창녀들과 음탕한 짓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방으로 온갖 금을 그어놓고, 자기는 의로운 척, 깨끗한 척, 거룩한 척, 신실한 척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어 놓은 선을 모두 깨트리셨다. 그들이 ‘인간쓰레기로 취급하는 이들조차도 기꺼이 만나시고 받아들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McGrath, p54).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인간 이하 취급받는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분명히 기록하였다. 그건 초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인간 이하 취급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사회에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박해받았으며, 사회에서 소외당하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혐오 받는 사람들, 소외당하는 사람들, 배제당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들의 공동체’다. 그건 ‘하마르티아’ 공동체가 아니라 ‘아디키아’ 공동체였다. 그들은 사회에서 ‘너희가 죄인이다. 너희는 인간쓰레기다. 너희는 사회를 좀먹는 악당들이다’라는 욕을 먹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부정하다 손가락질받는 사람을 자신의 식탁교제에 초청하였다(Sanders, p247).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에게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전하였다. 예수님은 ‘너희가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왔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그들 등에 붙은 ‘땅의 백성’이란 꼬리표를 떼시고 ‘하나님의 백성’이란 꼬리표를 새로 붙여 주셨다. 지금도 세상에 속한 자들은 그가 종교인이든 아니든, 아직도 다른 사람들 뒤에 ‘땅의 백성, 하찮은 사람, 기생충, 중독자, 정신이상자, 이교도’ 등 온갖 나쁜 꼬리표를 붙이려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이 선긋기를 즐겼던 것처럼 요즘 그리스도인도 역시 선긋기를 즐기는 듯하다. 진정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라면, 선 긋기를 하여서 ‘배제’와 ‘혐오’와 ‘차별’을 외칠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전파하므로 갈등과 단절과 분열의 사회를 하나로 엮을 수 있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de Vaux Roland, Das Alte Testament und seine Lebensordnungen(구약시대의 생활풍습), 이양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3
Joachim Jeremias, Jerusalem zur Zeit Jesu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 2008
McGrath Alister, Incarnation(성육신), 이용중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07
Sanders E.P. Jesus and Judaism(예수와 유대교), 황종구 옮김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Strauss L. Mark, Four Portraits One Jesus(네 편의 초상 한 분의 예수) 박규태 옮김, 성서유니온, 2018
Volf Miroslav, Exclusion and Embrace(배제와 포용) , 박세혁 옮김, IVP, 2014
Wright N. Thomas, Jesus and the Victory of God(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https://www.youtube.com/watch?v=dZUx6G56TcM&t=62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