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난 울보였다. 지금도 나는 가끔 혼자서 울기도 한다. 감동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심지어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울 때가 있다. 주변에서는 나이 들어서 그런다고 한마디씩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말하였다.
“남자는 울면 안 돼."
“남자는 강해야 한다."
'남자는 일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태어날 때,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만 울어야 한다. 그게 남자란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것은 성경의 남자들은 울기를 잘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황당한 울음은 야곱의 울음이다. 야곱이 삼촌 라반을 찾아 머나먼 길을 걸어서 하란에 도착하였다. 그가 삼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우물가를 찾아갔다. 그때 때마침 아리따운 아가씨 라헬이 양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우물을 찾아왔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본 야곱은 우물을 덮고 있는 돌 뚜껑을 번쩍 들어 옮겨 주었다. 아마도 둘은 통성명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삼촌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었다(창29:11). 여자는 가만히 있는데 남자인 야곱이 울고 있다. 그때 라헬이 얼마나 황당하였을까?
나는 야곱의 울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여 주석을 찾아보았다. 10여 권을 읽어보았지만, 딱히 설명해 놓은 주석이 한 권도 없었다. 그렇지. 주석가들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프레이저 경이 쓴 “구약시대의 인류 민속학”을 읽다가 해답을 찾았다.
구약 시대 눈물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서로 마주 잡거나 목을 끌어안고 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둘째, 진심으로 우는 경우가 있다. 셋째, 회개의 눈물이 있다.
야곱의 눈물은 인사성 눈물일 가능성이 크다. 일부 주석가들은 야곱이 고된 여행 끝에 친척을 만난 기쁨으로 울었다고 하지만, 이는 남자와 여자의 경우이므로 인사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남자와 남자의 만남에서도 형식적인 울음이 있다. 이를테면 사울의 울음이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 용변을 보려고 동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동굴 안에 숨어 있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살짝 베었다. 그리고 나중에 다윗은 사울에게 말하였다.
“나는 왕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왕께서 나를 죽이려고 이렇게 군사를 몰아오셨습니까?"
다윗의 말을 듣고 사울이 감동하여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면서 목놓아 울었다(삼상24:16). 그렇다고 사울이 다윗을 해할 마음이 없어졌느냐? 아니다. 그 후에도 사울은 다윗을 죽일 생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울의 울음은 진심이라기보다 형식적인 인사치레 성 울음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욥이 고난당한다는 소식을 들은 세 친구가 욥을 찾아왔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발견하고 이렇게 행동하였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욥기2:12)
어찌 보면 굉장히 과장된 행동 같아 보이지만, 이건 분명히 그들이 처음 만나면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마치 조선 시대 상갓집에 들어갈 때 사람들은 억지 울음을 지으며 통곡하던 것과 비슷하다.
유대인들은 인사하는 절차는 상당히 길고 복잡하였다. 정식으로 한 번 인사하면, 보통 3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도대를 파송하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셨다(눅10:4). 그것은 인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구약의 인물들이 형식적인 인사치레로만 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울 때도 종종 있었다. 눈물 하면 요셉을 빼놓을 수 없다. 요셉이 처음 형들을 만났을 때는 전혀 울지 않다가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만났을 때는 감정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었다(창43:30). 그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애굽 사람들이 들을 정도였다. 그의 눈물은 명백히 진실한 감정 표현이었다. 그는 충혈된 눈과 눈물에 젖은 두 뺨을 물로 깨끗이 씻고 다시 침착한 얼굴로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나중에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대성통곡하며 서로 인사를 한다(창45:2). 물론 그가 나이 많이 든 아버지 야곱을 만날 때도 역시 얼굴을 구부려 울며 입 맞추었다(창50:1). 요셉이 마음으로 울며 인사를 한 것은 틀림없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첫째 부인인 미갈을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미갈은 발디란 남자와 재혼하여 이스라엘 제일 북쪽 도시 라이스에서 잘살고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미갈을 따라 그녀의 남편은 예루살렘 바로 옆 동네인 바후림까지 울면서 따라왔다. 우리나라로 표현하면, 신의주에서 서울까지 쫓아오며 울었다는 이야기다. 미갈을 너무나 사랑하여기에 헤어지기가 쉽지 않았던 발디의 눈물은 진실하였다. 아무리 유대인이 헤어짐의 인사를 길게 한다 할지라도 몇 날 며칠을 따라오면서 운다는 것은 그의 아쉬움과 섭섭함이 진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이별하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20:37)
다 큰 남자들이 서로 목을 안고 엉엉 우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강한 남자가 되라고 훈련받으며 살아가는 21세기 남자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남자고 여자고 눈물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며 너 보기를 원한다고 기록하였다(디모데후서1:4). 어떤 설교자들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디모데는 여성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밀레도에서 바울과 헤어짐의 인사를 나눌 때 흘린 눈물이다. 그때 디모데만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바울 역시도 울었다. 흔히 오해하기를 사도바울은 냉철하고 강한 남자로 생각하지만, 뜻밖에 그도 눈물이 많은 남자였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에베소 교회를 목회할 때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
그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 병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시56:8). 과장이 좀 섞이긴 하였지만, 다윗은 자신의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셨다고 하였다(시6:6). 시편 저자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는지 그것이 양식이 되며 음료가 되었다고 하였다(시80:5). 그러고 보면 예수님도 웃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울었다는 기록은 군데군데 눈에 띈다(요11:35, 눅19:41).
셋째 회개의 눈물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란 별명을 가졌다. 그는 예레미야 애가에서 자신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기록하였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예레미야애가3:49)
그가 왜 울었는가? 그것은 예루살렘에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곧 닥칠 재난상황에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선포하였다.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렘9:18).
예레미야는 재앙이 다가오기 전, 평화의 시기에 앞으로 닥칠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의 애곡하는 소리를 미리 듣고 있었다. 속히 눈물 흘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은 피할 수 없다. 회개하는 흉내만 내선 안 된다. 진심의 회개, 통곡의 회개가 필요하다.
우리는 눈물을 나약함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냉혹한 얼굴을 하면서 감정을 억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병들고, 마음을 진심으로 나눌 상대를 잃어버려, 절대 고독에 혼자 괴로워하는 시대에 살아간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눈물은 슬픔을 해소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며, 몸 안에 내장된 놀라운 치유 장치”(Kübler-Ross, p70)라고 하였다. 눈물이 마른 사람은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병든 사람이다. 눈물은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감성과 강한 생명력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한다(김희재, 67).
예수님은 여러 차례 우셨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고 우셨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홀로 다 감당하시기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 예수님은 ‘우는 자는 복이 있다’(눅6:21)고 하셨으며,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11:17) 현실을 안타까워하셨다.
오늘 이시대는 눈물이 메마른 시대이다. 감정의 통로가 막힌 시대이고, 마음을 나눌 상대를 잃어버린 시대이고,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 어린 선포가 들려오는 시대요, 우리를 대신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시대이다. 이제 성경의 사람들이 눈물로 서로 마음을 나누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눈물이 회복되어야 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기록하신다고 하였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56:8). 눈물은 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눈물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하나하나 기록하시고, 때가 되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변하여 환희의 춤을 추게 하실 것이다(시30:11). 반대로 이 땅에서 울지 않는 자는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우는 일이 생길 것이다.
참고도서
Frazer G.James, Folk-Lore in the Old Testament(구약 시대의 인류 민속학), 이양구 옮김, 강천, 1996
Elisabeth Kübler-Ross & David Kessler, On Grief and Grieving(상실수업) 김소향 옮김, 도서출판 이레, 2007
김희재, 나이 듦에 대한 변명, 리더스북,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