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혔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146:8-9)
세상은 언제나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죽이고, 강한 자들의 ‘논증과 선전으로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고’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고 미로슬라브 볼프는 말한다(Volf, p349). 약한 자들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기에 언제나 우물쭈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바로 그때 요구된다. 그건 힘 있는 자들의 화려한 말솜씨를 차단하고, 말 못하는 자(잠31:8)의 ‘가냘프고 불안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정한 정의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언제나 그 점을 강조하였고, 시편 저자 역시도 그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시편 저자가 한 말 중에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란 말이 의미심장하다. 보통 비굴이란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글 사전에 비굴이란 ‘용기가 없고 비겁하거나 줏대가 없고 품성이 천한 자’란 뜻을 가진다. 그래서 고신대 신득일 교수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런(비굴한) 자를 일으키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신득일, p196). 그러므로 공의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비굴한 자’에게는 보호와 은혜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비굴의 뜻을 정의한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누구를 향해 비굴이란 말을 할까? 일반적으로 비굴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의 시각이요 강자의 정의이다. 약한 자를 짓밟으면서 그들을 조롱하는 말로 ‘비굴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의 비굴이 천성이라고 비웃는다. 약자들은 다른 사람이 내리는 명령에 굽실거리며 복종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약자는 상대방에게 괴롭힘을 당할수록 즐거워하는 마조히스트(masochist)라고 생각한다. 고대 사회는 사람을 노예와 주인으로 구분하였다. 노예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주인은 노예에게 명령하고 채찍질하고 심지어 죽일 수 있다. 그들은 약한 자들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한다. 반면에 노예는 주인의 학대에도 언제나 미소를 지어야 하며 기쁨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 시대 사회구조였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비굴’이란 뜻이 정립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배자들은 지혜롭고 그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이상적인 국가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철저하게 강자(지배자)의 논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만든 체제, 강자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약자, 외국인과 비굴한 자의 편에서 서신다. 하나님은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시는 분이다(사1:17).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 (렘22:16)하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간사하고 불의한 권력자들 손에서 약한 자들을 건져내시는 정의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이다. 세상은 언제나 강자의 편이고, 가진 자의 편이어서 늘 불공평하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43:1). 따라서 강자들이 정의내리고 판단하는 ‘비굴한 자’는 하나님이 보실 때 반드시 보호해야 할 자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강자 앞에 무릎 꿇은 소위 ‘비굴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들 편에 서 주신다.
성경에 보면 소위 비굴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다윗이 사울 왕의 압제를 피하여 블레셋에 망명한 적이 있다. 일찍이 다윗은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오랜 원수 사이였다. 그런 관계에서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곤궁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모두 의심의 눈초리로 다윗을 보았다. 다윗은 그러한 환경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의 비굴한 모습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였다. 다윗은 그들을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다’(삼상21:13).
원수의 나라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턱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는 다윗의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다. 그는 이제 블레셋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다.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해야 하고, 말을 해야 했다. 그는 블레셋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러다 자기와 부하의 가족 모두가 아말렉의 포로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안 다윗과 부하들은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원수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하였던 다윗, 그를 믿고 따랐는데 처자식까지 모두 잡혀가고 말았다. 그들의 분노는 폭발하여 다윗을 돌로 치자고 소리쳤다. 다윗의 삶에 이보다 더 추락한 적은 없다. 돌을 들어 자신을 치려는 부하들 앞에서 다윗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블레셋의 왕과 신하들 앞에서 했던 것처럼 비굴한 태도를 또 취하였을까? 부하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었을까? 제발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였을까? 성경은 그때 다윗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기록하였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베드로 사도는 초대교회 결혼한 여성들에게 권면하였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3:1). 이 말씀은 초대교회 상황을 이해해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베드로는 편지를 쓰면서 초대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흩어진 나그네’(벧전1:1)라고 하였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 나그네요 행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처럼 행복을 위하여 결혼하고, 사랑 때문에 결혼했을 거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들의 남편은 불신자, 곧 ‘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벧전3:1)들이었다.
기독교인은 박해와 멸시와 천대를 받는 나그네들이었으며, 나그네의 딸들 결혼생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리스 역사학자 플루타르크와 디오 카시우스는 ‘로마인은 소녀가 12살이 되면 결혼시켰고, 심지어 더 어린 나이도 있었다’고 하였다. 딸을 오래 키워봐야 먹을 것만 축나니까 지참금을 받고 팔아 넘겼다(Stark, p163). 당시 멸시와 천대를 받고 박해받던 나그네의 딸이 어떤 결혼 생활을 했을까?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은 전무하였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여성의 인권은 2,000년이 지나야 겨우 확보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드로의 말을 생각해야 한다. 베드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온갖 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부인들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하였을 것이다(배경락, p142). 유진 피터슨은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아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남편에게 착한 아내가 되어, 남편의 필요를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이야기에 무관심하던 남편도 여러분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에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 - 머리 모양, 몸에 걸친 보석, 옷차림 - 가 아니라, 여러분의 내적인 마음가짐입니다”(벧전3:1-4).
김동길 교수는 ‘나이 듦이 고맙다’라는 책에서 ‘하늘에 줄을 대면 비굴하지 않다’고 하였다(김동길, p124). 비록 발은 이 땅에 디디고 있지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 줄을 대고 있는 사람은 비굴이 비굴이 아니다. 다윗은 비록 블레셋 왕 앞에서 미친 척하며 침을 수염에 흘렸지만, 그의 마음은 하늘에 줄을 대고 있었다. 초대교회 결혼 여성들 역시, 불신 가정에서 온갖 고통을 다 당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을 지켰다. 그들의 겉모습만 보면 ‘비굴’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비굴’하지 않았다. 그들의 겉모습을 보면 웃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엔 피눈물이 있었다.
세상에 살다 보면,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니면서도 선뜻 제출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있다. 처자식 때문에 남들에게 듣지 못할 소리를 들어야 하고, 온갖 모욕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가족이란 마지막 보루가 있는 한, 우리는 그걸 비굴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마지막 보루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 세상에 살면서 비굴하게 머리 숙여야 할 때도 있고, 때로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욕을 먹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될 것은 하늘을 향한 마음,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한다. 억압과 굴종과 박해 아래 있을 때 그리스도인이 취할 태도는 하늘의 끈을 붙잡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기독교 공동체의 자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골방에 들어가 금식을 하며 40일 기도를 하고, 경건을 유지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기독교가 영성을 강조하고, 경건을 강조하고,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개인의 경건으로만 그치고, 타인과 사회의 부조리함을 묵인하는 핑계가 되어선 안 된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것은 아모스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암5:2)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확실하게 밝히셨는데, 이제 기독교가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분명히 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비굴한 자들을 비굴하다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고 차별하는 자리에 설 것인지, 아니면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 곁에 서서 힘이 되어주고, 그들을 위로하는 자로 설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이 무엇인지를 바로 찾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희망이 없다.
참고도서
Volf Miroslav, Exclusion and Embrace(배제와 포용) , 박세혁 옮김, IVP, 2014
Stark Rodney, The Rise of Christianity(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 좋은 씨앗, 2016
Peterson H. Eugene, The Message : The New Testament(메시지 신약), 김순현,윤종석,이종태 옮김, 복있는 사람, 2009
신득일, 101가지 구약 Q&A2, 기독교문서선교회, 2018
김동길, 나이듦이 고맙다, 두란노서원, 2016
배경락, 성경 속 노마드, 샘솟는 기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