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성하라.
인류의 역사는 흩어짐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땅에 충만하라"(창 1:28). 이 말씀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문화 명령 중 하나이다. 흔히 이 말씀을 생육과 번성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창세기 41장 52절을 보면 요셉이 둘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겨우 아들 둘을 낳고서 ‘번성하였다’고 하는 건 어딘가 어색하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를 많이 낳는 건, 아비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다. 시편 저자는 노래하기를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4-5). 화살 통에 화살이 몇 개나 들어갈까? 고대 화살 통은 관처럼 생긴 가죽 통으로서 대략 20~30개의 화살을 담았다. 그러니까 화살 통에 가득한 화살은 최소 20개 이상이다. 구약 이스라엘 시대, 복 받은 사람은 야곱처럼 12명의 아들을 낳았거나 기드온처럼 70명의 아들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요셉은 지금 달랑 2명의 자녀를 낳고서 '번성하였다'고 노래한다. 이건 번성이 아니라 수치다. 그렇다면 요셉이 말하는 번성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자녀를 낳은 기쁨을 넘어, 그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서 그의 영향력이 땅끝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영향력이 얼만 큰지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겠다'라고 하셨다(창 17:5,6).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민족의 번성, 숫자적 번성으로 해석한다. 번성 신학, 풍요의 신학은 성경에 나오는 번성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가는 자녀는 이삭 하나뿐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번성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이므로 모든 믿는 사람을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성을 이야기하실 때, 단순히 숫자적 번성만 뜻하진 않았다. 그것은 영적 영향력의 확장이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역사의 성취요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
흩어짐의 복
따라서 창세기의 문화 명령(창 1:28)은 인간의 생식과 번성만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 퍼져 나가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문화 명령은 인간의 흩어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흩어지지 않고서 땅에 충만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흩으심은 징벌적 차원보다,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은혜의 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에서 추방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 3:23). 겉보기에 이 말씀은 징벌이지만, 동시에 문화 명령을 이루라는 뜻을 담은 복이다. 그것은 심판이며 동시에 구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처럼 양면적이다. 십자가의 구원도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은혜요 복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다. 하나님의 구원도, 심판도 이처럼 양면성을 띠고 있으므로 우리는 성경을 단순하게 보아선 안 된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은 그를 땅에서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명백히 하나님의 심판이요 징벌이다. 가인은 자신의 벌이 너무 크다고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내가 벌을 받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터인데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두렵다"(창 4:14).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의 생명을 보전하여 주었다. 단순히 생명 유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흩어져 문화와 문명을 건설하였다.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유발은 음악가가 되어 퉁소 전문가가 되었고,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가 되었다. 가인의 후손이 만든 문화는 훌륭하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탐욕을 이루는 데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쉽게도 그들은 땅에 흩어져 문화와 문명을 건설하였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하지 않았다.
가인의 후손만 흩어진 것은 아니다. 노아의 후손도 땅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창 10:5).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가 흩어져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이루는 것이다. 가인의 후손은 자기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는 문화를 건설하였다면, 노아의 후손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문화를 건설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가 만드는 문화가 어떤 문화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세상의 문화를 따라가거나, 흉내 내기를 한다면,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걸어도 그건 세속의 문화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야 한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확장하는 일이다.
바벨탑 - 제국주의의 상징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 도전했던 가장 큰 사건은 바벨탑 사건이다. 수메르 문명은 일찍부터 탑을 쌓았다. 무엇 때문에 쌓았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학자는 신전이라 하고, 어떤 학자는 천문관측을 위한 것이라 한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단 하나의 장소, 단 하나의 언어, 단 하나의 탑은 보편적인 야심을 품은 중앙집권적인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체제를 위한 대들보를 제공할 것이다. 인류는 확실히 하나가 되고 분명히 위대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Volf, p360). 바벨탑은 분명 막강한 권력의 힘이 아니면 건설할 수 없다. 바벨탑을 건설했다는 건 그 당시 이미 힘으로 지배하는 제국주의가 있었다는 뜻이다.
바벨로 상징되는 제국주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였고, 하나의 목적(탑 쌓기)을 위해, 한 장소(시날 평야)에 모였다. 그들은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였고,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민족은 모두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바벨론 세계는 다른 언어(다른 의견)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제시하는 ‘가치관에 굴복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Brueggmann, 2017, p127)에 따라야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보는 것을 금하였다.
제국주의는 백성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집권자의 뜻에 절대복종하도록 강요하였다. 제국의 통치자가 원하는 것을 위해선 백성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따라야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진시황의 만리장성, 바벨탑은 모두 그렇게 만들어졌다. 고대인의 기술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불가사의한 건물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땀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제국은 언제나 백성의 희생을 강요한다. ‘시경(詩經)’에는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징집된 젊은이가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며 읊은 시가 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또 어머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이 어미 저버리지 말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너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신영복, p29)
강제 노역에 끌려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겉보기에 만리장성이나 바벨탑이나 피라미드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힘없는 백성의 눈물이고 고통이고 희생이고 죽음의 집합체일 뿐이다.
나치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중세 가톨릭은 종교재판, 마녀재판, 십자군 전쟁을 통해 백성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였다. 현대 자본주의는 돈과 스포츠와 오락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집권자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 없이 따르도록 선동한다. 백성의 협력과 협동, 하나 됨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어떤 가치관에 바탕을 두었는가? 따져봐야 한다. 가인의 후손은 제국주의, 전체주의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월터 부르그만은 바벨탑의 의미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흩어짐’을 두려워한 결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흩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저항하는 것이다.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은 흩어지는 것을 원치 않고, 그 대신에 그들 자신의 안전한 동질성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탑과 도시는 흩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맞선 채로 이기적인 하나 됨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상징한다.”(Brueggemann, 2000, p165)
유현준 교수는 수메르 문명의 권력자들은 엄청난 노동력, 경제력, 정치력을 동원해서 바벨탑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곳은 소위 ‘성스러운 곳’으로 신이 임한다는 미명으로 오직 제사장(권력자)만 올라갈 수 있었다. 신의 이름을 빌리긴 했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 자기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고, 백성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바벨탑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에 대항하는 인간 반역의 상징으로 중심화의 상징이다(이정용, p175).
바벨탑 - 흩으심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다시 흩어버리셨다(창 11:7,8). 전통적으로 흩으심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거기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뜻도 담겨 있다. 하나님은 이미 노아 후손의 언어를 나누고 흩으셨다(창10:5,20, 31-32).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땅 끝까지 흩어져 번성하라고 하셨다. 흩어짐은 징벌이며 동시에 은혜이다.
구약학자 폰 라드는 ‘죄의 퍼짐, 은혜의 퍼짐’이란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형벌의 역사인 동시에 은혜로운 보존의 역사다. 바벨탑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성경은 곧이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하는 이야기를 통해 구원 서사를 이끄신다(von Rad, p165-166). 아브라함은 제국의 수도인 우르에 살면서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흩어진 나그네라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뭉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서 이룬다. 낮아지고 내려가므로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셨다. 현재 기독교는 바벨론 제국처럼 바벨탑을 쌓으려 할 때가 많다. 교회의 힘을 모아 예배당을 거대하게 짓고, 세상 권력을 좌우할 힘을 행사하려 한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긴 하지만, 그건 인간의 탐욕을 숨기고 백성을 일치단결시키려 했던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다.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물론 하나님도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분만 내세우고, 백성을 괴롭게 하는 거짓 일치를 해체한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바벨론 제국이 했던 방식이 아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를 흩으셨던 하나님께서 오순절 사건을 통해 하나 되게 하셨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은 언어 일치가 아니라 이해의 일치요, 포용의 일치다. 바벨 제국처럼 언어가 하나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천하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은 각기 자기 방언으로 말하였지만, 모두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서로서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준다는 뜻이다.
누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미로슬라브 볼포는 ‘다’ 말했다는 누가의 주장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였다(Volf, p363). 바벨탑을 쌓을 땐 백성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약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뭐라 말을 하면, 오히려 채찍과 형벌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일치를 위해 단합을 위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에서 백성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말하였다. 약한 자라고, 변두리 인이라고 소외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자기 목소리로 자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들었고, 모두 이해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하나 됨이다.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억눌렸던 목소리가 담대하게 예언할 것이며, 닫혔던 눈이 열려 비전을 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 비전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참고도서
Volf Miroslav, Exclusion and Embrace (배제와 포용), 박세혁 옮김, IVP, 2014
Brueggemann Walter, Genesis, Interpretation :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현대성서주석, 창세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Brueggemann Walter, Cadences of Home : Preaching among Exiles(탈 교회화 시대의 교회), 이승진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2017
von Rad Gerhard, Das erste buch Mose : Genesis (국제성서주석, 창세기) 한국신학연구소, 1988
이정용, Marginality(마지널리티), 신재식 옮김, 포이에마, 2014
신영복, 담론, 돌베개, 2015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E-book, 을유문화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