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Logos Brunch Oct 01. 2021

인류, 추방의 역사

해방과 추방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 두개 있다. 하나는 애굽에서 해방(exodus)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으로 추방(exile)이다. 해방은 귀향이고 추방은 귀양이다. 귀향은 구원이고 귀양은 심판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얼마나 기뻤을까? 그들이 애굽이란 제국 아래서 고통받던 것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꿈과 같았다. 애굽 제국은 히브리인을 괴롭히기 위하여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을 시키는 데 하나같이 가혹하였다(출1:14). 그들은 히브리 자손의 번성함을 막기 위해 남자아이를 없앨 계획을 세웠다(출1:16). 그들의 탄식과 신음은 하늘의 하나님 귀에까지 들렸다(출2:23). 세상의 그 어떤 강대한 세력도 애굽 제국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내셨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다. 그들에게는 이제 가야 할 곳, 약속의 땅이 있었다. 약자(애굽의 노예)가 온전히 주인이 되는 나라에 대한 꿈으로 가득하였다. 그들은 희망으로 가득하였고,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힘이 있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등짝을 때리는 바벨론의 채찍은 현실을 절감하게 하였다. 포로로 끌려가는 길은 끝이 없는 지옥이었다.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었다. 그들의 앞날은 깜깜하였다. 걷다가 지쳐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하였고, 바벨론 군대는 그들이 짐이 된다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 여기저기 흐느끼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젠 그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잡을 건 하나도 없었다. 절망이다. 끝이다.


구약 성경은 이 두 사건을 중심축으로 쓰였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약속과 이집트 제국에서 건져내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주는 해방이 전반부의 내용이라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는커녕 세상의 제국을 흉내 내면서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괴롭히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후반부의 내용이다.


성경 전체로 보면 이 축은 조금 바뀌어서, 전반부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에서 추방되는 사건이고, 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이루는 사건이다. 추방과 해방, 심판과 구원은 성경의 중심 메시지다. 역사는 이 둘 사이에서 인간의 반응을 기록하였다. 세속의 역사는 끊임없이 권력자(리더)들이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욕망으로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없이 약자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보라는 요구(절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요구)를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 사이에서 세상의 안목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과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자이다.



현실감이 없는 해방과 추방


문제는 성경의 이 두 중심축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이론적으로나 지식적으로는 다 아는 것 같지만, 현실 감각은 턱없이 모자란다. 나는 나라 잃은 서러움을 겪어본 세대가 아니다. 현재 우리는 추방과 억압과 차별의 아픔을 개인적으로 경험할지 모르지만, 민족 전체는 그 아픔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모두가 아파하고, 모두가 힘들어하고, 모두가 괴로워하던 그 시절을 잊어버리고, 있는 자는 없는 자를 괴롭히고 갑질하고 비웃고 조롱한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희망으로 백성이 하나였을 때도 있었다. 반지하 단칸방에 살면서도,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보자는 의욕으로 가득했던 때도 있었다.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공장 쪽방에서 살면서 일하던 때가 있었다.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고, 송충이를 잡던 시절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철저하게 이기적이 되었다. 해방의 감격과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과 비난만 쏟아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추방과 해방 이야기, 구원과 심판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 건 이런 사회적 상황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원인으로만 돌릴 수 없는 기독교 자체의 문제도 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이용하여 자기 잇속만 챙기던 기득권자와 야합하고, 그들의 번성을 위하여 기도해준 기독교는 스스로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를 발로 차버린 꼴이 되었다. 누구라도 추방보다는 해방, 귀양보다는 귀향, 포로보다는 자유, 억압보다는 위로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좋다고 모두 좋은 건 아니다. 해방을 제대로 알려면, 추방을 알아야 하고, 자유를 알려면 포로와 억압을 이해해야 한다. 추방과 해방은 반대말이긴 하지만, 해방 속에 추방이 있고, 추방 속에 해방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만 골라 뽑아 읽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의미의 절반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구원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긍정적 사고방식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심판 속에서 흘렸던 눈물과 신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낙관적 사고방식으로 끝나고 만다. 성경을 추방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추방의 의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06년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22살 나이에 칼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아 ‘어거스틴의 사랑’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일 년 후 철학자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꿈많던 그녀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27살 되던 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녀는 풀려나자마자 파리로 도피하였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무국적자로 10년을 버티다 1951년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유대인 난민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뿌리뽑혀 추방된 삶을 깊이 성찰하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세계로부터의 소외’라고 진단하면서 추방을 깊이 있게 탐구하였다(양창아, p211).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고, 타인들과 함께하는 ‘공통의 삶의 형식’을 상실하였다. 공동체가 함께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공통의 경험을 잃어버리고, 서로 양 극단으로 갈라져 싸움만 일삼고 있다.


추방은 단순히 자신이 살고 있던 장소에서 내쫓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맺었던 모든 관계에서 내쫓김이다. 추방은 장소와 인간,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추방은 곧 죽음이다. 추방은 가족 공동체마저도 해체한다. 그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때 공산주의가 가족 체계를 해체하고 집단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는데, 역설적이게도 현대 자본주의가 가족과 공동체를 해체하고 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 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경험했던 관계의 따뜻함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이제 에덴의 사람이 아니다. 죄악된 세상의 사람이 되었다.


정치지리학자인 존 애그뉴(John Agnew)는 장소의 의미를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세계를 보고 알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장소의 세 가지 특징을 위치, 현장, 장소감으로 설명하였다. (Cresswell,p9) 첫째, 위치(location)는 지표면 상에 고정된 객관적 좌표를 뜻한다. 어떤 장소에 대한 매우 단순하고 객관적인 설명이다. 둘째, 현장(locale)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장소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를 의미한다. 태어나 자라면서 경험한 사물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그 사회(장소)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그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그 장소에서 터득하였다. 셋째, 장소감(sense of place)은 장소에 대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애착을 의미한다.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그리워지는 것이 인간이다.


추방은 이 모든 것에서 내쫓김을 의미한다. 물리적인 공간에서 내쫓김이고, 사회적인 모든 관계에서 내쫓김이고, 정서적인 관계에서 내쫓김이다. 이제 새롭게 직면해야 할 사회에서 그는 낯선 사람이고 이방인이고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외국인이다. 구약 성경에서 추방은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출31:14, 레13:46). 너는 이제 ‘우리’가 아니다. 그들은 성 밖에 머물러야 하며, 심하면 외국으로 쫓겨난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곳에서 천대받고 차별받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중세 때 중죄인은 평화상실의 선고를 받고 공동체에서 추방당하였다. 평화상실의 선고란 누구든 그 인간을 죽여도 된다는 뜻이다. 이제 그를 지켜주거나 변호해 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평화상실자를 당시 말로 바르구스(Wargus)라고 하는 데, 이는 늑대를 뜻하는 말이다. 늑대처럼 인간에게 쫓겨 다니다가 언제 어디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阿部謹也, p80). 중세 가톨릭이 종교재판이란 이름으로 공동체 추방형을 자주 내렸다. 루터는 파문형을 받고 바르구스가 되었다. 그가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성경의 추방자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아담과 하와만 추방의 아픔을 겪은 것이 아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강제적 추방을 경험하였다. 노예였던 요셉에게 권리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하여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고통받았을 요셉을 우리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남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던 요셉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모세는 살인을 저지르고 광야로 도망하여 40년을 지냈다. 사람 하나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허송하며 지냈을 모세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40년이라는 삶의 무게가 그에게 얼마나 크고 무거웠을지 짐작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다윗은 장인이었던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 다니다 적국인 블레셋에 망명(exile)하여 미친놈처럼 행동하였다. 침을 수염에 흘리며 공연히 대문짝에 끄적거리며 미친 척하던 다윗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상황은 다르지만,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였다. 성경은 고향을 떠나 사는 나그네, 외국인, 추방자 이야기로 가득하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하였다(히11:13). 베드로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정의하였다(벧전1:1,2:11).


인간의 역사는 추방에서 시작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추방하여)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3:23)

추방된 사람의 소망은 첫째, 생존이고 둘째, 귀향이다. 본회퍼는 그의 책 ‘창조 타락 유혹’에서 추방된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살고 싶은 것, 생명에 대한 한없는 갈증이라고 하였다(Bonhoeffer, p140). 비굴하더라도 살아야 하고, 치사하더라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삶의 질은 생존이 보장된 후에 생각할 문제이다.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는 추방된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의 모습,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폭력과 욕심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추방하기 전이나 후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땅을 경영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비록 그들이 추방되었지만, 창조 때부터 계획하셨던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추방된 자들이 만들었던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다. 억압, 폭력, 공포, 욕심, 갈등, 싸움이 범벅된 나라였다. 창세기 11장까지 읽으면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범죄함으로 추방된 인간에게 희망은 있을까? 세상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희망이 있을 턱이 없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무리 옳고 바르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 희망을 이룰 수 없다.


여기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 창 12장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으셨다. 그에게 고향을 떠난 추방자의 삶, 나그네의 삶을 요구하셨다. 그를 모델로 하여 고향(세상 나라)을 떠났다 다시 고향(하나님의 나라)로 귀향하는 소망을 보여주려는 뜻이었다. 가인의 후손이 세운 나라는 참된 고향이 아니다. 아무리 거대한 탑을 쌓고, 제국을 건설하고, 문화와 문명을 건설해도 그곳은 사람이 안주할 곳은 아니다. 권력자나 기득권자들에게는 편안하고 좋은 곳일는지 모르지만, 억압당하는 약자들에게 그곳은 지옥이다. 아브라함은 가인이 세운 나라를 떠나 스스로 추방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내딛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갈 바를 모르지만, 비록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는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갔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세워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스스로 추방자의 삶을 선택하신 분이시다. 그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가장 약한 자로 오셨다. 그는 세상에서 온갖 멸시와 차별과 억압을 견디면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하신다. 즉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다. 아브라함이 참된 고향을 찾아 돌아가고자 하는 신앙인의 여정을 보여주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추방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시면서 그들을 이끌어 참된 고향으로 인도하는 구원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시인과 촌장의 노래 중 ‘풍경’이란 노래가 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귀향의 풍경은 아름답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추방의 아픔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다른 추방자의 손을 기꺼이 잡아 고향으로 이끄는 사람이 곧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출23:9).


참고도서

양창아, ‘한나 아렌트의 장소론’, 코기토 76,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4년,

Tim Cresswell, Place : a short introduction (장소), 심승희 옮김, (서울 : 시그마프레스) 2012년,

阿部 謹也, 甦える中世ヨ?ロッパ(중세 유럽 산책), 양억관 옮김, (서울;한길사) 2005

Dietrich Bonhoeffer, Schopfung und Fall (창조 타락 유혹), 문희석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년,140쪽

매거진의 이전글 룻과 보아스의 결혼 뒷 이야기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