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동생을 쳐 죽인 가인의 항변이다. 설령 동생을 죽이지 않았어도, 가인의 말에 평소 가인의 생각이 어떠한 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 것이며, 존중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며 이해하는 것이고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다 그가 죽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율법 핑계를 댔지만, 사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손해요 위험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이 죽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심판받고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요나는 질서와 법(진리)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은 투철하였지만, 사랑은 없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일까?
‘남이야 죽든 말든, 나(우리)만 구원받으면 최고다.’
‘예수 신앙은 내(우리)가 이 땅에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다.’
‘공룡 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마틴 루터는 죄란 ‘자기에게로 굽은 상태(incurvatus in se)라고 했다. 이기주의, 자기 교회 중심주의, 자기 민족 중심주의는 모두 자기에게로 굽은 상태이다. 타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이미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안토니 볼룸(Anthony Bloom, 1914~2003)은 이렇게 말했다. “I love you”라고 말할 때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I’를 큰 소리로 말하고 ‘you’는 작은 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love를 접속사로 사용하기만 할 뿐 행동을 암시하는 동사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랑을 이야기만 할 뿐 실천하는 데 인색하다. 물질문명이 그러하듯 기독교도 사랑을 돈(헌금)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음이 담긴 행동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양한 관계의 그물 안에 존재한다. “자신의 다양한 관계를 거절하는 자는 사회에서 받기만 하고 베풀지 않는 약탈자나 다름없다”(Peterson, 212). “사랑은 우리의 주요한 관계 방식이자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의 방식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관계와 무관하게 이기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사회를 오염시키고 자아를 파괴하는 지독한 행위가 되고 말 것이다”(Peterson, 215). 유진 피터슨 목사는 받기만 하려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사랑받으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존경받으려 하고, 은혜받으려 하고, 관심받으려 하고, 복 받으려 하는 그리스도인이 넘쳐난다.
에리히 프롬은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을 ‘소유욕 사랑’이라 부르고, 관심과 배려, 책임과 존중을 보이는 사랑을 ‘생산적 사랑’이라 불렀다(Fromm, 164). 히브리어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뜻하는 단어는 똑같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타자)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웃을 배려하지 못하며, 이웃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라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눅10:37). 아파하는 이웃 곁에서 함께 울어 주고, 그 곁을 지켜주는 그리스도인이 한국 교회를 살린다.
Peterson H. Eugene,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Where Your Treasure is) E-book, 김순현 옮김, 서울 : 포이에마, 2015년
Fromm Erich, 자기를 위한 인간(Man for Himself), 강주헌 옮김, 서울 : 나무생각,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