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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26. 2022

우리는 지금까지 절제를 오해했다.

어머니!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이름이다.

소리내어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솟구칠 것 같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날 때 이제는 기력이 없어 걷는 것도 힘들다고 하셨다.

양로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하는 마음에 늘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 어머니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계셔서 늘 혈당 조절, 음식 조절과 더불어 운동에 힘을 쏟으셨다.

자녀는 모두 자기 일에 바빠 어머니를 돌아볼 여유가 별로 없었다.

손자 손녀들은 장성하여 각기 자기 길을 가고 있어 명절 때가 돼야만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대부분은 외국에 있어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

자녀 손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어머니로선 섭섭함이 컸으리라.


그래도 어머니는 참 씩씩하였다.

힘든 내색, 싫은 내색 안 하시고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하셨다.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걷던 불광천을 홀로 걸으셨다.

아주 가끔 어머니의 동무 되어 걸을 때면 참 기뻐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등 뒤에 진득하게 묻은 외로움을 보았다.

하루하루 무슨 재미로 사실까?

그래도 어머니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셨다.


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어느 교우의 가정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늘 음식 조절에 힘쓰던 어머니이기에 준비한 음식을 약간만 드셨다.

식후에 커피가 나왔을 때 어머니는 살짝 유혹을 받으셨다.

커피를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꾹 참고 사양하셨다.

그날 커피는 케냐 AA였다.

케냐의 커피는 향이 풍부하고 맛의 균형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과연 커피의 향이 거실을 가득 덮었다.

묵직한 바디감과 은은한 과일 향, 신맛이 적당히 어우러졌다.

소화도 잘된다는 말에 어머니는 마침내 굴복하셨다.

나는 마시던 커피를 맛만 보시라고 어머니에게 드렸다.

한 모금 드시더니 깊이 감탄하면서 말씀하셨다.

“정말 맛있다!”

어머니의 감탄에 주변 모든 사람이 함께 웃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손뼉을 치며 좋아하시는 모습이 마치 소녀와 같았다.

그렇게 딱 세 모금 마셨다.

나는 어머니의 절제하는 모습을 보고 저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흔히들 절제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시대, 기독교는 절제 운동을 펼쳤다.

기독교는 망한 나라를 회복시키는 운동으로 금주, 금연, 마약과 도박 퇴치를 절제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하였다.

이는 19세기 초 서구에서 사회개혁 운동의 하나로, 금주를 목적으로 한 절제운동의 영향이기도 하다.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총무였던 이효덕은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는 창립된 이후 … 간접으로 직접으로 제가 듣기는 이회 명칭은 금주회라고 알게 되었습니다”고 언급하였다.


C.S. 루이스는 절제(Temperance)의 의미가 절대 금주(teetotalism)로 변질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절제는 음주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쾌락과 관련된 말로서, 완전히 삼간다는 뜻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Lewis, p.132).

절제는 금욕과 다르다.

금욕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태도다.

옳고 그름, 아군과 적, 선과 악을 두부 모 자르듯이 나누는 태도다.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세상은 언제나 내 편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려고 한다.


정몽주 어머니는 ‘백로야 까마귀 싸우는 곳에 가지 마라”고 하였다.

이원론자들이 볼 때는 매우 고결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원론자의 가장 큰 미덕은 금욕(선 긋기)이다.

확실하게 선을 긋고 절대로 그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는다.

혹 누가 선을 넘으면 견디지 못하고, 비판과 정죄를 일삼기 일쑤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특정 부류의 악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이 포기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닙니다.”(Lewis, p.133)


절제는 제어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혹시나 선을 넘을까 두려워서 아예 선 근처에도 안 가는 금욕이 아니다.

절제에 중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분별은 시선을 모아 자세히 보다, 주시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잘 생각하다 등의 뜻이 있다.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심사숙고하는 것이다(Lewis, p.130).

하나님은 상황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어떤 희생도 감당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죄악으로 가득한 죄인의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셨다.

흠도 없고, 죄도 없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천국에서 고상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다.

죄인들과 부대끼며, 함께 호흡하고, 함께 울고 웃고, 고통을 나누며 사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절제의 삶을 보이셨다.


먹을 땐 먹으셨다.

때로 죄인이 베푸는 잔치 자리에 참여하셨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셨다.

피곤하실 땐 주무셨다.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 우시기도 하셨다.

화가 날 땐, 채찍을 들기도 하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

자신을 조절하시고 통제하시고 바르게 이끄셨다.

그 모든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정확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시고, 세상과 함께 걸으시면서 세상을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흑과 백을 나누는 심판(정죄)능력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른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과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이효덕, “절제운동 어떠케할가,”〈기독신보〉894호(1933년 1월 18일).

C.S. Lewis,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 장경철,이종태 옮김, 홍성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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