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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09. 2016

사랑의 추억 모으기

큰딸이 필리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고무 지우개를 모으기 시작했다. 갖가지 동물 모양의 지우개부터 시작해서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지우개들을 모았다. 네모난 나무 상자에 고무 지우개를 가지런히 정렬하는 큰애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지우개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하며 자랑하였다.

“이건 아빠가 한국에서 사다 준 지우개야. 너희 이런 거 없지?”


기러기 아빠였기에 아이 곁을 지키지 못하였던 난 자랑하는 아이의 뒷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짠해졌다. 사실 아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고무 지우개가 아니라 아빠였을 텐데. 운동회 때에도 함께 하지 못했고, 학부모들 앞에서 학예회를 할 때도 난 없었다. 한 학년이 불과 6, 7명되는 작은 학교였기에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점심 봉사를 하여야 하는데 난 한 번도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필리핀에 갈 때면 언제나 큰딸이 이뻐할 만한 지우개를 수집하는데 열을 올렸다.

아빠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였음에도 큰딸은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이제 올여름이면 결혼하고 정식으로 아빠를 떠나겠지. 태어나서 자라는 28년 동안 큰딸과 함께 있던 시간은 손꼽을 만큼 적은 시간이다. 그러기에 짧은 순간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선교사 훈련받을 때 풀밭에서 손 그네를 태워주던 일.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아빠 배 아파” 하면서 울먹이던 큰딸의 배를 쓰다듬어 주던 일. 그땐 왜 그리 배가 자주 아팠는지…. “아빠 손은 약손이다!” 하면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곤 했었지. 잠시 중국에 유학 중이었을 때 학교 기숙사에 찾아갔더니 학급 친구들이 나를 보자마자 “Sunny 아빠지요?” 하면서 까르륵 웃었지. “어찌 알았어?” “걷는 모습이 똑같아요.” 나는 그 말에 턱밑까지 기쁨으로 차올랐지. 한국, 필리핀, 중국, 다시 필리핀 그리고 캐나다. 돈이 넉넉치 못하여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공부해야 했던 넌 얼마나 힘들었을지... 혼자 힘으로 아르바이트하고 장학금 받으며 어렵게 공부하는 널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아빠를 용서해다오.


이제 결혼하면 너의 얼굴을 보기가 더욱 어려워지겠지. 비행기 좁은 좌석에서 반나절을 날아가야 겨우 만날 수 있을 테니…. 죽기 전까지 널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이제 너도 아이 낳고 살게 되겠지. 자녀가 공부 잘하고 바르게 자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고 보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인 것 같아. 지지고 볶고 싸워도 함께 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듯싶어. 성애야! 넌 자녀들에게 투자하는 시간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으면 해. 자녀들이 수집하고 모아야 할 것은 고무 지우개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 듬뿍 담긴 추억이니까. 살아보니까 결국 남는 것은 다른 게 아닌 것 같아.


사랑의 추억 모으기 그게 최고인듯싶어. 성애야! 미안하다.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적어서 미안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너만을 사랑했던 이 아빠를 가슴 속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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