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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02. 2022

아우라의 몰락, 아우라의 상실

사진에 취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 때 아버지가 캐논 카메라 AE-1을 사주면서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주로 사람을 찍는다.

골목길 풍경 속에 스며드는 태양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사람을 찍을 때 기쁨이 넘쳐난다.

나를 향하여 꾸밈없는 환한 웃음을 보여주는 사람을 찍을 때 기쁨이 샘 솟는다.

솔직히 나는 자연보다 사람이 더 좋다.

그러다 사진에 취미를 가진 친구 목사들과 자그마한 동호회를 만들었다.

동호회에서 출사를 나가면, 대부분 풍경 사진을 찍는다.

풍경 사진은 주로 새벽이나 저녁노을 시간에 찍는다.


사진 동호회는 새벽 시간에 촬영하려 나가는 경우가 많다.

노을 시간은 몰라도 새벽 시간에 일어난다는 건, 나에겐 힘든 일이다.

목회하면서 힘든 것 중 하나는 새벽기도였다.

어떤 목회자는 “새벽 기도만 없어도 목사 할 만하다”고 하였다.

나는 거기에 크게 공감한다.

어떤 사람은 새벽형 인간이 성공하는 인간형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난 결코 성공형 인간이 아니다.

나는 밤중형 인간이니까.


아무튼 사진 동호회 새벽 출사는 고역이지만, 약속은 약속인지라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에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날은 고삼 저수지와 안성 목장에서 사진을 찍기로 하였다.

새벽에 사진을 찍으러 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이런 열정으로 목회하면 더 잘할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삼 저수지에 갔다.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 멀었건만 사람들은 삼각대를 펼쳐 놓고 아침 태양을 기다렸다.

나도 삼각대를 피면서 속으로 불평했다.

‘이게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일출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새벽 공기는 싸늘하여 차가운 귀에 손이 저절로 갔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수다를 떨면서 피곤을 애써 잊으려 하였다.

마침내 동쪽 하늘의 색깔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불쑥 태양이 떠올랐다.

붉고 화려한 혀를 날름거리며 떠오르는 태양은 찬란하였다.

그건 여유롭게 기다리던 저녁노을과는 사뭇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이래서 이 모든 고생을 불사하고 오는구나!’

말로 표현 못 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자연이 내뿜는 아우라에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우라에 관해 탐구했던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를 경험하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선을 받은 사람이나 시선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선을 열게 된다.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여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Benjamin, 2010, p.240)

아우라는 일종의 ‘신비한 기운’이며 ‘호흡’이다(심혜련, p.196).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자연을 감싸는 분위기와 기운이 있다.

이것은 1회에 한정된 사건이기에 휘발성을 가지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Benjamin, 2016, p.50)

아우라는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예술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경험한 아우라의 순간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다.

내가 고삼 저수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찍는 것도 그러한 욕망의 발로이다.

중세 예술가들은 성화를 그릴 때 예수의 머리를 감싸는 둥그런 원을 그려 아우라를 표현하였다.

물론 그들이 직접 예수를 만난 것은 아니고 상상으로 그렸다.


독일의 발터 벤야민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아우라를 자신의 예술철학에 사용하였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에도 원작이 가지는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 즉 아우라가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원작의 힘(아우라) 때문에 진품에 매달린다.

그런데 예술작품의 진품을 보기는 쉽지 않다.

원본을 보려면, 그것이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야만 한다.

이것을 벤야민은 예술작품이 가지는 아우라의 본질은 ‘거리감’과 ‘접근 불가능성’이라고 하였다(심혜련, p.201).


문제는 복제기술이 발전하면서부터이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Benjamin, 2016, p.47).

모나리자의 원본을 보려고 프랑스까지 갈 필요가 없다.

모나리자의 복제품들은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벤야민은 ‘아우라의 몰락’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카메라가 나오면서 원본의 재현을 목적으로 광학적인 이미지, 즉 사진 촬영이 범람하였다.

사진은 현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점(수렴의 토폴로지)을 제공한다고 에드몽 쿠쇼(Edmond Couchot)는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伊藤 俊治, p.196).

사진은 움직임의 순간을 정지시키고 가두어 버린다.

아우라의 몰락이자 상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원본들은 모두 상상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다.

실재 인물이나 자연환경을 보면서 느낀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과 경이로움과 신비로운 기운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삼 저수지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새벽 일찍 일어나 불평하면서 갔던 시간,

일출을 기다리며 손을 비비면서 입김을 불어넣던 순간

별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었던 친구들

쌀쌀한 아침 기온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그에 따른 기대감과 흥분

마침내 떠오르는 시뻘건 태양

그것들을 어떤 그림이나 사진이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만일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면, 그때 그 순간의 경험을 어찌 말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애당초 예술작품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아우라는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말하는 진품이니 원본이니 하는 것들도 어찌 보면, 참된 아우라는 아닌 셈이다.

남들보다 더 잘 표현했기에, 그 작품에 아우라를 부여하기 위해, 거대한 미술관을 짓고, 입장료를 받고, 화려한 액자에 끼워 놓았기에 우리는 아우라가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기술 복제 시대에 아우라가 실종되었다고 벤야민은 탄식하였지만, 우리는 사람과 자연이 머금은 진정한 아우라를 외면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참고도서

심혜련,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몰락 이후의 아우라”,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동녘, 2013

Benjamin Walter, Das Paris des Second Empire bei Baudelalre Über einige Mltive bei Baudelaire(보들레르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김영옥, 황현산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Benjamin Walter,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16.

伊藤 俊治, Artists of the Fin de siecle(최후의 사진가들), 양수영 옮김, 타임스페이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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