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에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많은 목사님이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먼저 이 비유에서 제일 첫 번째 청중은 예수님의 비유를 직접들은 사람들입니다.
두번째는 이 비유를 기록으로 남긴 마태의 청중, 즉 초대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이 비유를 읽던 사람들, 즉 우리가 있습니다.
이 셋은 다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따라서 이 세 청중은 모두 이 비유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청중은 이 비유를 들을 때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첫번째 예수님의 청중들에게 결혼식 이야기는 매우 친숙한 이야기요, 실제적인 이야기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소품들을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식 이야기는 그냥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들의 실수가 있습니다.
그건 열 처녀 비유에 나오는 소품들, 기름, 등불, 기름 파는 사람, 신랑의 늦은 도착 등 여러가지를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합니다.
화란의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는 그의 주석에서 이 비유에 많은 알레고리칼한 특징이 있지만, 이 비유는 결코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Ridderbos, p.710).
그건 보수적인 신학자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성서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 역시 그 점에 동의합니다.
예레미아스는 구약 및 후기 유대교의 문서들을 검토한 후, 신랑을 메시아로 해석하는 알레고리는 찾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건 바울에게서 처음 나타나며(고후11:2) 예수님의 청중은 신랑을 메시아로 해석할 생각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아스는 말하길 이 비유를 처음 들은 청중들은 실제적인 결혼식 이야기로 들었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종말론적 교훈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Jeremias, p.49)
중동에서 중동의 관점으로 복음서를 읽은 케네스 베일리는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만 끝내지 않고,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기를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렸다고 하는 유대 민족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임했지만, 그들은 그 나라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집단과 갈릴리 사람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에도 그 나라를 맞이하지 않는 유대 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커다란 실망감이 담겨 있습니다(Bailey, p.427)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기다린다고 하면서, 아니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배웠으면서도 실제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을 때 그들은 그 나라를 거부했습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문제는 오늘 우리도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외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자 하면서, 정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그 나라를 이루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기 위하여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말만 하지, 실제적으론 아무런 실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이 비유에서 첫번째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가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가 언급한 것처럼 분명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점을 잊어버리고 알레고리칼하게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잔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졸며 자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지, 신랑이 늦어짐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는 것은 본질을 놓치고 주변을 맴도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마태의 청중, 초대교인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엄청난 희생과 노력을 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사람도 있었고, 순교 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말로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돌보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물고기 그림을 그리기만 해도 고향과 친척과 인종과 언어를 구분하지 않고 기쁨으로 환대했습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꺼이 죽는 자리에도 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10년 20년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 임할 것인가?
그들의 간절한 소망은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과 헌신이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엔 역부족이란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루셔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사모했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그때 해석 점이 예수님의 청중과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초대교회가 교인들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알레고리라고 하였습니다(Jeremias, p.167).
마태는 자기 청중들, 즉 초대교인들에게 이 비유를 가르치면서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상황에서 그들이 깨어 있으라는 권면을 하였습니다(김득중, P.216)
여기에 대해 큄멜은 “깨어 있으라’는 마태의 권면은 예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마태가 초대교회 상황에서 덧붙인 교훈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깨어 있음이 아니라 준비였기 때문입니다(Kümmel, p.52).
아무튼 초대교회 상황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큰 문제였고, 이에 대한 가르침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열처녀 비유도 바로 그런 상황에서 재해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신랑의 지체를 예수님의 지연된 재림으로 해석하자 다른 것도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교회사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은 “이 비유는 알레고리로 가득한 교회의 표현 양식으로서 예수라는 인물을 강력하게 지시한다”고 하였습니다(Beasley-Murray, p.375)
키스트메이커는 이런 알레고리칼한 해석을 소개합니다.
“열 처녀 비유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방식 아래 풍유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와 같은 해석들에서 예수님은 신랑이고 열 처녀는 교회이다. 교회는 선한 자와 악한 자, 택함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 슬기로운 자들과 미련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처녀들이 가지고 온 등은 선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행위를 사람들 앞에 비취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름은 성령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에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기름 상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보라 신랑이로다”라는 외침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게 될 하나님의 승리적인 외침이다.
이러한 종류의 해석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종종 어처구니없는 귀결을 가져온다”(Kistemaker, p.148)
알레고리칼 한 해석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붙이느냐에 따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여기서 이 비유를 해석하는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를 조금 소개하려고 합니다.
김철손 교수는 예수님의 비유는 교리의 기본 사료가 되는 게 아니라는 트렐치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비유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일깨워주는 경종시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종말론적 동기에서 마태가 기록하였지만, 이 비유에서 우리는 시간의 위기를 발견합니다.
예레미야스도 이 비유의 첫 부분에 사용한 그때(tóte)에 주목한 것처럼 이 시간이라는 개념은 매우 실존적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 앞에서 시대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처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김철손, pp.178-181)
이점은 라인홀드 니버 역시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모든 약속과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 성취를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시간의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신랑이 도착하는 시간은 모든 역사의 완성 즉 메시야의 통치가 임하는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개인의 삶과 집단의 삶이 커다란 위기를 경험할 때마다 그 사건들 속에 숨어있는 시간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는 한 어리석은 처녀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Niebuhr, p.591)
자끄 엘룰은 ‘하나님 나라는 땅에서 사람을 통해 태어나고 활동’한다고 강조하면서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과제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빛을 비추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함을 지적하였습니다(Ellul, p.351-352).
그러니까 이들 학자의 공통된 강조점은 이 비유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먼 미래의 일로만 치부하며, 그것을 위해서 영적인 어떤 준비를 하는 쪽으로 혹은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쪽으로 해석하기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실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Bailey E. Kenneth, Jesus Through Middle Eastern Eyes Cultural Studies in the Gospels(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
Beasley-Murray G.R., Jesus and the Kingdom of God(예수와 하나님 나라),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Ellul Jacques, On Freedom, Love, and Power(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 전의우 옮김, 비아토르, 2017
Jeremias Joachim, Die Gleichnisse Jesu(예수의 비유), 허혁 옮김, 분도출판사, 1988
Kistemaker Simon, The Parables of Jesus(예수님의 비유), 김근수, 최갑종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Kümmel W.G., Promise and Fulfilment(약속과 성취), 김명용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Niebuhr Reinhold, 세계명설교대전집 제10권 루코크에서 니버까지, 성서연구사, 1985.
Ridderbos N. Herman, The Bible Student’s Commentary-Matthew(마태복음 하), 오광만 옮김, 여수룬, 1990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컨콜디아사, 1990
김철손, ‘10처녀 비유의 해석법’, 신학과 세계 (4), 1978.10. 168183(16pages) 감리교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