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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이 Aug 29. 2020

엄마는 나에게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외노자가 되어버린 딸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가이드를 하겠다며 필리핀으로 갔다. 사실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하던 때에 필리핀으로 가이드를 하러 간다는 것은 꽤 그럴싸한 카드였다. 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에 일을 하러 가는 상황이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학교 선배의 추천은 이 회사가 진짜 여행사는 맞는지 또, 현지로 가면 당분간 사장님 댁에서 지낸다는데 안전하긴 한 건지 여러 가지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집을 떠나 독립하겠다는 의지는 그 모든 걱정을 단숨에 누그러뜨렸다.


출국 전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입사한 여행사는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 인정받는 탄탄한 회사였다. 마닐라에서 지냈던 사장님의 집도 방이 많고 넓은 주택이었고, 나 이외에도 막 졸업한 또래의 신입들이 있어 같이 답사를 다니고 교육을 받으면서 많은 의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 명의 동기와 함께 세부로 발령을 받았다.


세부에서 막 첫 팀을 받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비자 문제로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 워킹비자를 취득하려면 꽤 긴 시간과 많은 돈이 들었다. 그래서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3개월짜리 관광 비자를 3개월마다 갱신하며 일하고 있었다. 관광비자의 갱신은 1년까지만 가능했고 그래서 모두들 1년에 한 번씩은 한국에 다녀왔다. 이것은 한국인 가이드들 사이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행해져 왔고 심지어 그 일을 전문으로 처리해 주는 공무원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나도 멋모르고 선배가 하라는 대로 따라서 여권을 맡겼다가 찾아왔었고 그렇게 관광비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딱 불법 외국인 노동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짙은 피부 색깔의 동남아계 사람을 보면 외노자라고 부르며 가까이 가기를 꺼렸다. 사실 그들 중에는 정식 워킹비자를 받아 일하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다 한 뭉텅이로 '불법'을 베이스로 외노자로 부르며 깔보았다. 그런데 그 짙은 피부 색깔의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와서 내가 불법으로 노동을 하는 외노자가 된 것이다.


만연하게 행해지던 일이 갑자기 문제가 된 것은 어느 한국인 가이드가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한인 사회가 들썩였고 이내 이민국에서 단속을 돌기 시작했다. 많은 가이드들이 모두 한국으로 또는 다른 도시로 옮겨갔고 나는 가이드 일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렇게 필리핀으로 나간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깊숙이 넣어둔 1년짜리 오픈티켓을 (돌아가는 날짜를 1년 안에 원하는 날로 지정할 수 있는 왕복항공권) 꺼내 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모두 돌아오라고 했고, 같이 입사한 동기들도 모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민국에서 단속을 하니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신입이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냥 다시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귀국 일정을 잡겠다고 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아니 상황이 얼마나 흉흉하게 돌아가는지 엄마는 모른다며 섭섭하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은 지금 들어오면 죽도 밥도 안되니 1년이라도 버텨보고 들어오라는 것이었고 생활비가 부족하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모두가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엄마의 그 한마디는 트리거가 되어 내 안에 있던 을 도전정신을 일깨웠고 불확실함에 휩싸인 두려움을 날려 주었다. 그리고 엄마가 나를 믿는 만큼 나도 나를 믿었다. (엄마가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나도 내 아이를 무조건 믿어주자.)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해보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민국의 단속은 계속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일을 할 수 없으면 어학연수라도 하고 가겠다고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방법을 찾았다. 한인 신문을 들고 와 보이는 곳마다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찾았다. 여기저기 여행사에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더 큰 여행사에서 일하기로 하고 세부를 떠나 보라카이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보라카이에서 나는 진짜 가이드가 되었다.


보라카이에서 나는 혼자서 많은 팀을 핸들링했고, 후기도 좋았다. 많은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매주 새로 만나는 허니무너들도 좋았다. 그들이 모르는 곳을 소개하고 알려주는 것이 즐거웠고, 그들의 인생에 오래 기억에 남을 허니문을 내가 만들어 준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도 했다. (지금 생각은 전혀 다르다. 허니문은 가이드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매일 다른 풍경의 노을을 보며 꿈같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 사는 것도 좋았다. 그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잡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번 도전에 성공한 나는 이후에도 인생에서 만나는 고비마다 어렵지 않게 도전을 외쳤다. 언젠가 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도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나를 믿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굴곡 많은 내 인생을 만든 것은 불어닥친 역경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 도전은 경험 많은 나를 만들었고,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을 쌓으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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