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학개론
결혼 10년 차, 남편의 모든 행동에 화를 내는 나를 발견했다. 한 때 긍정의 여신이었던 내가 매사에 불만인 비관 주의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것은 나만의 문제 같았지만 사실 많은 부부가 겪는 문제였다.
책 결혼학개론의 저자인 벨린다 루스콤은 결혼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가장 최적화된 수단이라고 말한다. 자다 일어나 떡진 머리를 하고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침대에서 나오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 할 수 있는 관계가 몇이나 될까? 그 모습마저 사랑해야 부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애송이다. 이 책에서는 사랑의 크고 위대함 따위는 배제되어 있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런 피상적인 것보다 당장 깊은 수렁에서 끄집어내 줄 해결책과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벨린다 루스콤은 타임지에 20년간 가족, 결혼, 육아 등을 주제로 칼럼을 써온 저널리스트이고, 결혼생활에 관한 기사로 수상이력도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30년 동안 지내온 결혼생활에 빗대어 어떻게 하면 결혼생활을 잘 유지 해 갈 수 있는지 유쾌한 문체로 책에 풀어놓았다.
그녀는 서문에서 결혼이 필수가 아니고 이혼은 간단한 선택의 문제가 된 시대지만 특정한 한 사람과 남은 평생을 살아가는 삶이 탁월한 이유는 많고, 오래된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빈티지 제품이 그저 오래되기만 한다고 해서 가치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듯 결혼생활도 고치고 다듬어 가치를 더해가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아주 현실적이고 적나라하게 결혼생활의 문제점들을 드러내 엄청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문제를 더 크고 특별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는 문제가 대부분이고 또 이 문제들은 결혼생활 속의 환경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더 많다. 결혼생활의 주체인 부부의 잘못 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은 여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는데 익숙함이 왜 문제가 되는지와 잘 싸우는 방법, 돈 문제, 잠자리 문제와 부부상담에 이르기까지 키워드만 들어도 현실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중 가장 흥미롭고 새롭게 읽은 부분은 첫 챕터였던 익숙함의 문제였다.
익숙함의 문제는 나에게 맞는 짝을 선택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콩깍지가 벗겨졌을 때, 나와 남은 인생을 함께할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지에 달렸다. p.36
결혼을 하기 전에는 내가 좋아했던 부분이 오랜 시간 같이 살면서 싫은 부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이 익숙함의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나의 경우 결혼 전에는 남편이 야구를 좋아해 함께 야구장에 가는 것을 즐겼었고, 사회인 야구단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생일이나 기념일마다 야구용품을 선물하며 응원했었다. 하지만 첫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을 겪던 시기에 주말마다 야구를 하러 가는 남편이 죽도록 미웠고 그 후로 남편은 두 번 다시 야구를 하러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익숙함의 진짜 문제는 상대를 무시하는 감정이 근저에 깔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를 당연하게 여길 때 생겨날 수 있고, 또 이것은 부정적 감정이 압도된 상태로 바뀔 수 있다. 만약 배우자의 밥 먹는 모습 조차 꼴 보기 싫어졌다면 당신은 지금 부정적 감정이 인지능력을 압도해 사소한 것부터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까지 모든 것을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익숙함의 문제 >> 무시하는 감정 >> 부정적 감정의 압도 >> 모든 것에 화가 남
그렇다면 이제 부정적 감정에 압도당한 인지능력을 다시 되찾을 차례다. 의식적으로 상대의 행동을 봤을 때 피어오르는 감정을 걷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상대의 싫어하는 행동을 봤을 때 그 행동만 판단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나쁜 의도가 없는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흔히들 생기는 사소한 다툼 중에 신었던 양말을 돌돌 말아서 벗어 두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때 이 행동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 행동은 나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몹쓸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돌돌 말린 양말이 세탁기에 들어가 봤자 전혀 세탁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 상태로 건조기에 들어가 단단한 공이 되어 나온 양말이 서랍 속에 들어가 다시 신어야 할 때의 불쾌함을 안다면 더 이상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 상태로도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다면 뭐 그것은 그의 취향인 것으로 인정하면 되는 일이다. 물론 이 일련의 과정을 싸움의 칼을 갈면서 상대를 골탕 먹이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배우자의 습관을 고쳐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좀 보기 싫은 것은 그냥 눈을 꾹 감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화가 남 >> 행동을 단순하게 인지 >> 나를 향한 의도를 빼고 해석 >> 반복연습
만일 지금껏 양말을 직접 펼쳐서 세탁기에 넣어 주었다면 돌돌 말린 채로 세탁하기 전에 미리 말은 해야겠지?(수천번은 족히 했을 말이겠지만) 양말을 펼쳐서 넣지 않으면 세탁이 되지 않고 나는 그 양말을 만질 생각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싸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때는 다정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해야 한다.
익숙함의 문제는 잘 싸우는 일에도 깊게 관여되어 있다. 익숙함의 문제에서 비롯된 무시하는 태도는 냉소적인 태도와 함께 시너지를 내고 급기야 빠져나오기 힘든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오래도록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같은 목적을 가진 팀원과 같은 위치에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생활 속에서 무수히 생겨나는 문제들을 같이 해결하기 위해 각자의 기량을 펼치기보다 팀워크를 중시해 함께 해쳐나가는 그런 관계 말이다. 돈 문제가 되었든, 육아 문제가 되었든 둘 사이의 갈등이 생기더라도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팀에게 서로를 잘 알고 익숙한 팀원은 시너지의 근원이 된다.
결혼이 우리에게는 좋은 선택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하나의 팀으로서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우리의 성격과 사고방식, 활동을 변화시켰고,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주었고,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 더 큰 기쁨을 주었다. p.278
사실 이 책을 읽고 나면 소원해진 부부 사이가 다시 건강한 관계를 되찾는 해법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이 그렇듯 외부에서 나에게 정확한 해답을 내놓는 일은 없다. 그저 작고 사소한 일들을 실천하면서 서로 조율해나가는 방법이 그 해법이 될 것이다.
책의 전반에 깔린 활용 가능한 팁 중 유용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감사 표현하기: 배우자의 잘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찾고, 감사함을 표현하되 부정적인 말을 덧붙이지 말 것.
예) 난로에 불 피워줘서 고마워!(O) 저녁을 요리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비싼 파르메산치즈를 다 써버렸네.(X)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상대에게 느낄 수 있는 분노나 원망을 낮춰주는 완충재 역할을 한다. 꼭 의도나 마음을 담지 않아도 된다. 입 밖으로 내뱉아 표현하면 된다.
부탁하기: 부탁받는 사람은 부탁한 사람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연구결과를 근거로 하는 프랭클린 효과를 이용한 방법이다. 상대가 너무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부탁함으로써 상대는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되고, 서로 좋은 감정을 유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단, 귀찮고 성가신 일을 부탁하는 것은 안된다. 예) 회사에서 이런 문제가 생겼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O) 청소기 좀 돌려줄래?(X)
잘 싸우기: 싸움을 피하기만 하면 둘 중 하나는 폭발하고 만다. 싸울 때만큼은 '나'관점에서 표현하고 비난과 불평이 아닌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간결함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왜 기분이 나쁜지를 너무 길게 이야기하다 보면 불만이 되려 쌓이게 되고, 상대는 집중해서 듣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싸움의 맥락을 항상 살펴야 한다. 싸움의 맥락이란 싸움이 일어나는 상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운전 중이거나 배가 고픈 상태로 싸우고 있다면 그 싸움은 진흙탕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크다.
돈 문제는 투명하게: 돈 문제에 얽힌 싸움은 반드시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혼과 돈 둘 다 안정감이나 피난처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감정중 가장 강렬하다고 할 수 있는 '두려움'이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나 돈문제는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끝이 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혼생활이 복잡해지고 부부관계가 너무 나빠지면 얽힌 실타래를 풀지 못해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해도 행복하기만 하지 않은 것처럼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을 선택해도 불행에서 벗어나 지지 않는다.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다.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어느새 단정하고 깨끗한 실타래가 새로 만들어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