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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플마 Aug 01. 2023

미스테리 김밥 실종 사건

(2023년 7월 31일 작성)


재미있는 브런치 글을 읽었다. 브런치에서 인기가 많은 글은 이혼 이야기와 김밥 이야기라고 하며 다양한 실증 사례들을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진짜 그럴까? 나도 인기 작가가 되어볼까?'

그런데 이혼 이야기는 쓸 수 있는 소재가 없다. 내 글의 대부분은 '아내를 사랑합니다'가 주제인데 여기에 이혼 이야기를 끼워 넣으려면, '이혼이 뭔데요?'의 내용으로 써야 할 판이다. 따라서 내가 도전해 볼 수 있는 글은 김밥 이야기이다.

마침 이 글을 읽고 난 직후였을 때 아내가 김밥을 사 왔다. 난 김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본 글감을 상기해 냈다. 기억 창고의 한쪽 구석에는 절대로 잊히지 않는 씁쓸한 김밥 이야기 하나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첫 김밥은 초등학교(국민학교) 1학년 소풍 때였다. 까마득한 옛날 옛적 얘기이다.  

내가 살던 곳은 시골이었기에 아마도 학교 인근의 작은 산으로 소풍을 갔을게다. 여기에서 장기자랑도 하고 보물 찾기도 했을게다. 대부분의 기억들이 흐릿하다. 너무나 오래되었고 아주 어렸을 적의 일들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날 내가 김밥을 먹었다는 것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맛있었다는 것까지도.

김밥이란 것은 언제 먹어도 맛있는 것인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김밥은 더 맛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난 김밥 도시락을 마구마구 먹었던 듯하다. 하지만 자그마한 체구의 나는 금방 배가 불러버렸고 도시락에는 김밥이 반이나 남았다. 이때 난 기특한 생각을 했다. 남은 김밥을 집에 가서 엄마와 아빠에게 드리겠다는 생각을.
소풍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난 아빠를 보자마자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맛있는 김밥을 아빠와 나눠먹는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시락은 텅 비어 있었다. 분명 나는 많은 김밥을 남겼다. 도대체 김밥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아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김밥은 어디로 갔을까? 이 미스테리를 어떻게 풀 것인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난 김밥이 남아있던 도시락을 가방에 넣었고 그 뒤로 도시락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 등에 메어져 있던 가방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김밥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난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김밥이 나 모르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 언제 있었던가를 추적해 보았다. 그러자 한 명의 용의자가 떠올랐다. 물증은 없었지만 그가 범인임은 백 프로 확실했다.
그 용의자는 아이스께끼를 팔던 형이었다. 꼬맹이들에게 아이스께끼는 최고의 군것질이었기에 아이스크림의 인기는 매우 좋았다. 하지만 돈도 없고 엄마도 동행하지 않았던 꼬맹이에게 아이스께끼는 먼 나라 얘기였다. 난 그저 속으로 입맛만 다실뿐이었고, 께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그 형이 마냥 부럽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 께끼 형이 어떻게 내 김밥을 훔쳐갈 수 있었을까?




그날의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자.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난 맛있게 김밥을 먹었고 반 정도 남긴 채로 도시락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 후로는 산속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아마도 사슴벌레나 새 둥지 사냥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다 그렇게 놀았었다. 그러던 중 아이스께끼 형을 만났다. 그 형은 내게 재미있는 얘기들을 해주며 나를 상당히 친하게 대해줬다. 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 께끼 하나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서였다. 그런데 내 속마음을 읽은 듯이 그 형이 갑자기 께끼를 주겠다고 했다. 거의 공짜로.
   "께끼 하나 줄까? 근데 너 사탕 있지? 사탕 한 개 하고 바꿔먹자."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사탕 한 개랑 께끼 하나를 바꿔 먹다니. 입 맛만 다시던 께끼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난 무조건 '예'를 외쳤다. 그러자 이 형은 아이스께끼 하나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고는,
   "사탕은 내가 꺼낼 테니까 넌 께끼 먹고 있어."
라고 하면서 내 등 뒤의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다. 약속대로 단 한 개의 사탕이었다.
그렇게 그 형은 씩 한번 웃은 후, '아이스 께~~~끼!'를 외치며 다른 아이들의 무리 쪽으로 향했다.
그날 난 너무도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께끼를 먹었다. 살살 핥아먹는 께끼는 최고의 맛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껴 먹었음에도 께끼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내 입맛의 즐거움도 금방 끝났다.
너무도 아쉬웠다. 더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얼마 후였다.
난 또다시 께끼 형과 마주쳤다. 내 간절함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 형은 대뜸,
   "께끼 맛있었니? 하나 더 줄까?"
당연히 난 '예'라고 대답했고,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었다.
난 께끼를 핥아먹고 있었고, 그 형은 내 등 뒤의 가방에서 사탕 한 개를 꺼낸 것이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내 김밥 도시락도 잠시 나들이를 다녀왔을 것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께끼 형은 왜 나를 속였을까?'

그냥 김밥을 나눠먹자고 했으면 나눠 줬을 텐데, 아니 께끼와 김밥을 바꿔 먹자고 했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나로서는 누군가를 속인다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분명 그랬으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너무 순진하다. 약삭빠르지 않다'라는 말을 무척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실제로 순진하기만 하거나 어리숙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난 어떤 것이 약삭빠른 행동인지를 알아도 그것이 옳지 않으면 그쪽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다.

소위 '정도' 또는 '순리'라고 하는 방향으로만 행동했다.

나를 어리석다고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이 께끼 형은 내게서 김밥을 훔쳐 먹은 사실을 자신의 무용담으로 자랑했을 것이다.

남을 속이는 잔머리를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런 행동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없어서이다.

요즈음 정치 뉴스, 사회 뉴스들을 보면 이런 사람들의 얘기들로 꽉 차있다. 남을 등쳐먹고도 뻔뻔하게 사는 사람들. 아마도 어쩌면 께끼 형도 이런 사람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이런 사태가 만연하고 또 용납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안 하면 바보가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다.


요즈음의 부모들은 자식 문제에 관한 한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손해보지 않으려 한다. 일단 이기고 이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소위 '정도'에서 벗어나는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순간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잔머리를 쓰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는 결코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좀 지면서 살고 남에게 양보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큰 행복감을 갖다 준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자식들에게는 이익과 승리에 집착하여 남을 등쳐먹으려 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쳐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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