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인생 최고 퍼즐과의 조우

회고록: PDP 3 (PDP 가스 압력 측정하기)

by 홍플마
이 글은 첫 직장이었던 S사 PDP 사업팀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서 이전 글들(회고록 1: 손질 잘 된 프로그램, 회고록 2: 그 많던 퇴사 이유는 어디로 갔을까?)에 이어지는 글이다. 앞의 두 글에서는 PDP 사업팀을 괴롭히던 큰 난제를 해결한 성과들에 대해서 소개했다. 본 글에서는 이전의 난제들에 비해서 중요도는 떨어지지만 가장 기쁨을 느꼈던 어떤 문제 하나의 해결 과정을 소개한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문제였다.


플라즈마 물리학의 동문 선배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와! 이것을 이렇게 풀어내다니, 천재구만!"


난 천재가 아니었기에 '천재'라는 말이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풀어냈다라는 '사실'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흐뭇하게 만든다.

PDP(Plasma Display Panel) 개발 과정에서 제기됐던 문제인데 마치 고급 퍼즐과 같은 문제였다.

통상적으로 퍼즐은 이미 답이 존재한다. 따라서 끈기만 있으면 답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접했던 이 문제는 답이 있는 퍼즐이 아니었다.

'혹시 답이 있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제기된 문제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결론은 '답은 없다'로 귀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그냥 포기하는 것이 맞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난 이 문제의 답을 찾아냈다.




PDP 개발 초기 때였다.

PDP 업체들은 대형 평판 TV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저마다의 독자 기술 확보에 애를 쓰고 있었다.

특허를 통한 기술 방어도 중요했고 상대방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 회피 기술 개발도 중요했다.

따라서 타 업체의 PDP 기술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 또한 중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들은 공개된 특허와 논문들을 통하여 거의 파악이 되고 있었기에,

기술 파악을 위하여 타 업체의 실제 제품을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런 화두를 던졌다.

"PDP를 완벽하게 리버스 엔지니어링 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하면 경쟁사의 PDP를 해체 분석하여 거기에 사용된 기술들을 다 알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체적인 답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세세한 기술 내용들은 차치하고라도 명확한 이유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PDP의 가스 압력은 절대로 측정할 수 없다'

였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바꿔보자.

PDP를 가스가 들어있는 유리병이라고 생각하자.

우리는 이 유리병 안 가스의 압력을 측정하고자 한다.
압력을 측정하려면 유리병 안에 압력계를 넣어야 하는데, 병 뚜껑을 여는 순간 가스가 빠져나오므로 올바른 측정을 할 수 없다. 병 뚜껑을 안열고 병 안에 압력계를 넣을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자, 이 유리병의 가스 압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문제를 다시 정리해 보자.

"밀폐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가스의 압력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의 답을 찾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대부분 금방 포기했다. 유리병을 열면 압력이 바뀌므로 안되고, 열지 않으면 압력계를 연결할 방법이 없어 직접적인 측정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레이저를 이용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법이 없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어떻게 어떤 원리로 해야한다라는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의 질문으로 끝이 나고 있었다.


나도 직접적인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꺼야.'

난 문제를 계속 붙들고 늘어졌다. 나중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꿈까지 꿨다.


그리고 찾아냈다.

약 3일 정도 지난 즈음 꿈 속에서.

압력을 알아내는 절묘한 방법을.




당시 우리 회사의 연구소에는 가스 시료 채집 장치가 있었다. 이 장치는 단순한 진공 챔버로서, 이 안에서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가스가 새어 나오면 그것을 채집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이 챔버에는 압력계가 달려 있다. 이것이 힌트이다.


우리는 유리병 안 가스의 압력은 측정할 수 없지만, 유리병을 열어 그 가스가 챔버를 채운 상태에서의 압력은 측정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렇다. 방법이 있다. '보일의 법칙'을 이용하면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배우는 그 법칙 말이다.


보일의 법칙을 상기해 보자. 보일의 법칙은 어떤 밀폐 용기의 부피가 작아지면 압력이 커지고, 부피가 커지면 압력이 작아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법칙이다. 이를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보일의 법칙은, 압력과 부피를 곱하면 일정하다는 내용이다.

보일의 법칙: 압력 X 부피 = 일정


이 식을 우리 상황에 적용해보면,

가스의 부피가 유리병의 부피에서 챔버의 부피로 바뀐다. 따라서 다음의 식이 얻어진다.

(유리병)압력1X부피 = (챔버)압력1X부피 -- <식 1>


이 식은 유리병의 부피, 챔버의 부피, 챔버의 압력으로부터 유리병의 압력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제 실제 값만 넣고 계산하면 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천재니 뭐니 하면서 떠들썩하게 시작한 서론에 비하면 결론이 너무 싱겁지 않은가? 이 정도로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면 사람들이 왜 불가능하다고 했었을까?




사실은 <식 1>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포기했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이다.

왜냐하면 유리병의 부피와 챔버의 부피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 내부의 구조는 아주 복잡해서 부피를 특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식 1>은 무용지물이다.


모든 사람들이 포기하는 이 시점에서 난 좀 더 생각을 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이 난제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사실 아이디어의 내용을 알고 나면 별것 아닌데, 그것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유형이다. 그렇기에 글의 서두에서 선배가 내게 '천재' 운운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별거 아니다. 천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방법은 이렇다. <식 1>에서 값을 모르는 부피를 없애버리는 새로운 식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번에는 유리병을 대기 중에 둔 상태에서 뚜껑을 닫은 후, 진공 챔버에 넣고 뚜껑을 열어 압력을 측정한다.

그러면 새로 얻어지는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유리병)압력2X부피 = (챔버)압력2X부피 -- <식 2>


<식 2>가 <식 1>과 달라진 부분은 유리병의 압력과 챔버의 압력뿐이다. 그런데 이 압력들은 우리가 모두 아는 값이다. 유리병의 압력2는 1기압이고 챔버의 압력2는 측정값이다.

이제 <식 1>을 <식 2>로 나눠보자. 그러면 절묘하게도 골칫거리였던 부피 변수들이 모두 제거된 후 다음의 식이 얻어진다.

유리병 압력1 = 챔버압력1 / 챔버압력2 --- <식 3>

이 식에서 유리병의 압력2는 값이 1이므로 생략되었다. <식 3>에서 압력들의 단위는 '기압'이다.


이 식의 아름다움이 보이는가?


<식 3>을 보면, 챔버의 압력을 두 번만 측정하면 이로부터 유리병의 압력을 알아낼 수 있다.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들었던 부피 변수들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후 우리는 테스트 패널들을 만들어 이 식이 유효한지 여부를 체크하였다. 결과는 완벽했다.

답이 없다고 했던 문제였는데, 수학적으로 너무도 깔끔하고 완벽한 답을 찾아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었겠는가? 그런데 당시에는 점잔을 빼느라 기쁜 내색을 감추고 있었다. 속으로는 분명 유레카라도 외치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한번 외쳐본다.

"유레카!"




이전의 회고록들에서 소개했던 난제들은 내가 PDP 사업팀에 기여한 성과가 대단히 큰 것들이라 그 자체로 회고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반면에 이번 문제는 PDP 사업팀에의 기여도는 매우 낮은 문제였다. 하지만 내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문제는 이번 문제이다. 이 문제는 퍼즐 매니아인 내게 인생 최고의 퍼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고록으로 작성해 보았다.


끝.


2023년 7월 17일 작성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 많던 퇴사 이유는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