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플마 Feb 05. 2023

프리다 칼로가 가르쳐 준 미술관 나들이의 재미

어제는  백화점에 들렀다가 아주 반가운 이름의 화가 이름을 발견했다. 프리다 칼로이다. 이 백화점의 10층에서는 프리다 칼로 사진전을 전시하고 있었다. 일정상 전시회를 참관할 시간은 없었지만 혹시 맛보기라도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입구 근처를 잠깐 기웃거리다 내려왔다. 평소 미술에는 거의 관심이라곤 없던 나인데, 프리다 칼로에게는 왜 이렇게 반가움을 느꼈을까? 마치 잘 아는 화가인 것처럼.


프리다 칼로는 '아내와의 미술관 나들이'라는 것을 내 생애 처음으로 의미 있고 기대감 있게 만들어준 화가이다. 아내는 종종 나와의 미술관 나들이를 좋아했던바, 사실 난 마지못해 그냥 따라가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난 미술 분야에는 문외한이었기에 미술관에서 무엇을 감상해야 할지를 몰라서였다. 미술관에 갈 때마다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전시된 작품들의 가치성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만 가졌었다.

'이 작가의 작품을 유명하게 만든 요인이 무엇일까?'

'저 정도는 다른 작가들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섬세한 손놀림이 좋아서인가, 정확한 표현력이  좋아서인가, 추상 표현이 기발해서인가? 아니면.....'




2016년 6월경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멕시코의 국민화가인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지못한  자세로 아내의 손에 이끌려 이 전시회에 갔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별 감흥 없이 작품들을 보았고, 빨리 나가 무엇을 먹을까만 궁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시회를 돌아보던 중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 속에서 그녀의 고통스럽기만 했던 삶이 그림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내 자세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 하나하나 마다 큰 사연이 담겨 있던 바, 난 그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과정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난생처음 미술관에서 메모라는 것도 해봤다.

집에 와서는 프리다 칼로에게서 받은 감명을 담은 관람  후기까지 작성했다. 아래에 그 후기가 있다. 이 후기는 일체의 인터넷 자료를 참조하지 않고 오직 내 메모만을 바탕으로 작성했는데도 여느 후기 못지않게 상세하면서도 정확하다. 이 정도면 내가 당시에 프리다 칼로에게 얼마나 감명 받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프리다 칼로라는 이름에 내가 반가움을 느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글은 당시에 작성했던 관람기이다. 이글에서는 오직 고통으로만 점철되었을 듯한 삶 속에서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그림에 집중하고 또 집중했던 프리다 칼로의 처절했던 가슴속 응어리를 표현하고 싶었다. 또한 그림에 대한 그녀의 천재성도 얘기하고 싶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그녀의 현재 고통이 어떤 것이고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누가 보더라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그림은 약간은 추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현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무튼 그녀의 작품들을 허투루 보고 싶지 않았기에 시작했던 메모였고 감상평인데, 이렇게 한번 정성을 쏟고 나니 미술 전시회란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이후로는 어느 미술 전시회를 가든지, 화가의 작품과 인생을 함께 연관지어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자칫 무료하기만 했었을 뻔한 아내와의 미술관 나들이들이 매우 즐거워진 것은 내 삶에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모두가 다 프리다 칼로 덕분이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도에 태어난 멕시코의 여류 화가인데, 초기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만 알려진 평범한 여성이었다.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보다 21세 연상이었으며, 멕시코에서 이미 대형벽화의 화가로 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유명한 화가였다. 하지만 이 평범했던 여성이 훗날에는 멕시코 정부에서 그녀의 작품들을 국보로 지정할 정도로 위대한 화가가 된다. 그녀는, 자신은 남편의 그늘 뒤에 숨어 있는 작은 여성이라고 늘상 표현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뛰어넘는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는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습작 기간을 따로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화가로서 활동한 초기부터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뇌를 잘 추상화하여 그림으로 표현해냈는데, 이런 훌륭한 표현이 그녀의 그림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한 핵심 요소이다.

그녀는 비교적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 다리가 기형이 된다. 하지만 이 정도의 불구는 평생 그녀가 겪게 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의학도가 될 계획으로 명문 국립예비학교에 다녔는데 여기에서 학교 벽화를 그리고 있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진지한 만남보다는 주로 리베라의 작업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마음속으로만 흠모하는 정도였다. 실제 연인으로는 알렉한드로라고 하는 멋진 청년이 따로 있었다.

프리다는 자신의 인생에서 큰 사고가 두 번 있었다고 종종 말했는데, 첫째는 버스 사고이고  좀 더 치명적인 둘째 사고는 리베라와의 만남이라고 했다. 이 중 첫 번째 사고는 프리다가 타고 있던 버스가 경전철과 충돌하면서 생긴 사고인데, 당시에 신문에도 크게 날 정도의 대형 사고였다. 이 사고 때 프리다는 버스의 손잡이 쇠창살이 복부를 통해서 하반신으로 관통되는 큰 상처를 입었는데, 기적적으로 생명만은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프리다는 이 사고에 대해서, '나는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프리다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으며, 평생에 걸쳐 큰 수술만도 32번이나 받는다. 그런데 이 수술들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각 수술 때마다 또 다른 후유증이 발생하여 손이 곰팡이균에 감염되어 못쓰게  되거나 발의 혈액 순환이 마비되어 발가락을 절단해야 하는 고통 등을 겪게 된다. 이런 육체적인 고통 외에도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정신적인 고통까지 당한다. 그녀는 가까스로 3번의 임신에는 성공했으나 매번 유산되는 불행을 겪는다. 그녀의 작품 중 유산을 주제로 한 걸작들이 몇 개 있는데, 그 그림들에는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이의 태아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떠 있는 침대'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림이 그려진 이유를 알고 난 후 그 그림을 다시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들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그림들을 많이 남겼는데, 대부분이 다 뛰어난 걸작들이다. '부러진 기둥'과 '상처 입은 사슴'등은 자신의 부서진 몸이 겪는 육체적 고통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그녀 작품의 또 다른 걸작들은 리베라를 통해서 탄생하게 된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리베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정작 리베라는 프리다보다는 자신의 작품 활동, 명성 유지 등에 더 신경을 썼고, 다른 여자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프리다를 결정적으로 고통스럽게 한 것은, 프리다가 가장 사랑스러워했던 바로 밑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리베라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였다. 이때 프리다는 집을 뛰쳐나가 혼자 살면서 그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한 바,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몇 개의 작은 상처들'이라는 걸작이다. 프리다는 결국 리베라와 이혼을 한다. 하지만 리베라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어, 곧바로 리베라와 다시 결혼을  한다. 이때 이후로는 리베라도 그녀의 삶이 좀 더 편해질 수 있도록 극도로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리베라는 일생동안 총 5번의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남자로서의 매력이 많았었나 보다.)

다시 이야기를 앞쪽으로 돌려보자.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버스 사고 이후로 병상 생활을 하면서 뭔가 집중할 일을 찾기 위한 것으로부터였다. 그리고 연인 알렉한드로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느낌 때문에, 그를 다시 붙들기 위한 선물용으로 자신의 자화상과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작품들이 그녀를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들이 아마도 공식적인 그녀의 최초 작품들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그 작품들이 완성될 즈음에는 알렉한드로는 이미 멀리 떠나버린 뒤라 작품을 선물할 수도 없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한편 그녀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공산당원이 되었고, 그에 대한 자신의 소신이 매우 명확하여 공산당 집회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그러다가 역시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던 리베라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21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때가 그녀 나이 22세 때였다.

프리다 칼로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이기기 위해 술에  많이 의지했는데, 말년으로 갈수록 그 의존도가 점점 심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술로도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자신의 고통을 아주 위트있게 표현했는데, 정말 천재다운 발상이다.

"난 고통을 익사시키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 못된 것들이 헤엄치는 방법을 배웠나 보다."

<끝>

(2023년 2월 5일 작성)




ㅡ 떠 있는 침대 (반복되는 유산의 고통을 표현)


ㅡ 상처 입은 사슴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비유)


ㅡ 부러진 기둥 (교통사고로 부스러져버린 육체의 고통을 표현)


ㅡ 몇 개의 작은 상처들 (남편의 반복되는 불륜에 심하게 상처받은 후)


ㅡ 두 개의 프리다 (리베라와 이혼한 후, 존경받던 자신과 버림받은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